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02회. 능바우 창꼬방으로재실집 앞으로 펼쳐진 들판이 누렇게 변했다. 올벼를 심은 논은 날 더울 때 추수가 끝나 진작에 텅 비었다. 논두렁을 차지하고 자란 콩대도 벼를 따라 똥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인자 나비 안 좋아허잖여, 새끼 쥐 잡어먹는다고, 아 그람서 왜 나비는 데꼬 갈라고 그리싼데?”“그려도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한열음 작가)'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행본은 국내 대형서점 및 인터넷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2024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작] 민주의 방 01회. 모두의 방 작은오빠랑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녹슨 못을 줍기로 했다. 언니랑 큰오빠는 학교에 갔다. 작은오빠랑 노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지만 할 수 없었다.“오빠, 쩌어기 옥수수, 옥수수.”길바닥에 멀쩡한 옥수수가 떨어져 있었다.“오메, 별로 드럽지도 않은디, 누가 흘리고는 그냥 가버렸나비네. 우리가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7장 The end The end-그건 가슴 시리도록 당신을 자유롭게 하지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비가 내렸다. 은행잎이 공중으로 휘돌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바닥에 쌓이는 소리가 들렸다. 빗방울 소리는 서서히 굵어져 빠른 비트의 음악처럼 들렸다. 나는 루시퍼를 꺼내어 연주했다. 여자가 두고 간 팜플렛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여자의 기획 아이디어는 언제나 빛을 냈다. 구보아저씨 이야기가 핫하게 퍼진 지금 추모공연 기획을 내놓다니. 어제부터 공연을 시작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추모공연을 하게 되면 구보아저씨가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6장 오디션 레트로 가든에 도착하자마자 구보아저씨는 재빨리 차에서 뛰어내렸다.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사람 맞아? 나는 크게 물었다. 용주가 없다는 걸 믿지 않는 눈치였다. 말리에게 전화를 걸어 용주가 D시에서 언제 오냐고 물었다. 용주랑 같이 있는데 뭔소리냐고 했다. 예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말리에게 용주와 당장 레트로 가든으로 오라고 했다. 드디어 용주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 온 거다. 용주가 안겨준 엄청난 충격의 여파가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구보아저씨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왔다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5장 만남 병실에서 만난 구보아저씨는 너무도 멀쩡해서 마치 딴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건강상태는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했다. 말리는 죽었다 깨어난 사람이라도 대하듯 호들갑을 떨었고 구보아저씨는 멀리 여행이라도 다녀온 표정으로 우리를 대했다. “넌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전쟁터라도 다녀온 거냐?”“어휴 살 만 한가봅니다, 농담까지 하시고. 그런데 아저씨, 범인 얼굴 보셨죠? 얼굴 보면 아시겠어요?” 여자는 당황한 듯 나를 툭 건드렸고 말리는 형 아까 화장실 급하다며? 하고 말을 돌렸다. 그러나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4장 비밀(3) 머릿속이 하얘졌다. 빨리 불을 켜야 했다. 전기 스위치가 있는 곳까지 열 걸음 가까이 가야 한다. 불을 켜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둠 속에서 놈과 대적하는 게 더 이로울까.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언젠가 놈이 다시 올 거라고 확신했지만 하필 무방비 상태인 지금 나타나다니. 놈과 어떤 식으로 대결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아저씨를 그렇게 만들 정도면 함부로 봐선 안 될 상대다. 기선제압을 해서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게 관건이다. 실내는 완벽하게 어둠으로 차단된 상태다.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4장 비밀(2) *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가는 길에 여러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다. 넋이 나간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그냥 멍했다. 미로를 간신히 빠져나왔나 싶었는데 다시 제자리로 와 있는 것처럼 암담했다. 당신이 내게 보여준 강력한 권력과 속박의 권한은 허공에 뜬 나무에서 비롯된 것처럼 근본이 없는 것이었나. 빈 좌석에 앉아 맞은편 유리창에 시선을 둔 채 생각에 잠겼다. 몇 개의 역을 지나쳐 지하철은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빛이 날카롭게 유리를 통과해 오른쪽 눈을 따갑게 찔러댔다. 사람들이 점점 많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4장 비밀(1) 이 주가 지났지만 구보아저씨의 의식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저씨의 표정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평온했다. 그동안 나는 병원에 면회 가는 날을 제외하곤 레트로 가든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주일도 안 되어 경찰 수사는 흐지부지 넘어가는 눈치였다. 피해자가 의식이 돌아와야 뭔가 밝혀질 텐데 지금으로선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거였다. 여자는 평소와 달리 병원으로 가는 내내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이제는 서로 말이 없어도 어색함을 견디는 관계는 아
에필로그11934년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남시정식의 아내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해가 창호지를 바른 창문에 넘실거렸다. 정식은 이불을 덮지 않고 두루마기를 입은 채 벽 쪽에 잠든 듯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요즘은 술 먹고 늦게 들어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곤 했다. 평소처럼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맡에 떨어져 있는 손바닥만 한 흰 종이가 눈에 띄었다. 오래전부터 남편이 지니고 다니던 생아편이 떠올랐다. 순사보에게 두드려맞은 이후 진통제로 복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 낫고도 궂은날엔 뼈가 수
6장이별4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집안은 어둠과 적막에 휩싸였다. 할아버지가 늦게까지 책을 읽곤 하던 사랑채에서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허청 처마 밑에 수북이 쌓여 있던 장작 더미도, 그 옆 빈터에 집채만 하게 자리 잡았던 짚 누리도 보이지 않았다. 농사 규모가 현격히 줄었다. 새경을 줄 수 없게 되자 십수 년을 함께 살던 머슴 팔복이도 떠났다. 앙상한 나뭇가지들과 정식의 두루마기가 바람에 맞서며 내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고요를 깨뜨렸다.우두커니 서서 집안을 넘겨보던 정식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할아버지 내외와 부모님에 대한 인사를 그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3장 침입자(2) “아저씨, 공연 늦지 않게 오세요. 준비 다 해놓을 테니까요.” 이른 점심을 먹고, 잠깐 어디 들렀다 갈 테니 먼저 가 있으라던 구보아저씨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물건을 구하러 간 건 아닌 눈치였다. 대체 어딜 간 걸까. 한 번도 개인적인 일로 공연을 펑크 낸 적은 없었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다거나 병원에 약을 타러 갈 때는 언제나 나와 동행했고, 물건을 구하러 갈 때도 한나절을 넘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어쩔 수 없이 지역 복지관의 ‘청춘靑
6장이별2옥화네 주막 기둥에 걸린 호롱불이 주탁에 앉은 정식과 배찬경을 비추고 있었다. 배찬경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꾸 밖을 곁눈질했다. 몹시 불안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안이 밖보다 더 밝아 밖은 보이지 않았다.“돈이 필요 없으면 안 찾아오려고 했어? 감시가 더 심해졌나?”눈빛에 그답지 않게 애원을 담은 배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중차대한 일이라도 생겼나 보지?”배찬경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의지할 동무라곤 자네밖에 없는데, 어디 가려고?”정식은 일제의 감시 아래에 있는 남시에서는 더는 못 살겠다고 한 배찬경의 말을 떠올렸다. 배찬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3장 침입자(1) *그날도 장마철 소나기가 계속 쏟아졌었다. 쉼표에서 레트로 가든으로 가는 중이었다. 바닥에 고인 물과 쏟아지는 빗물에 발이 철벅철벅 소리를 냈다. 드문드문 세워진 차량의 몸체에 요란한 소리로 떨어지는 빗소리도 시원하게 들렸다. 거센 비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비에서 마른 흙냄새가 진동했다. 가로등 불빛이 풀어진 물감처럼 흐물흐물 번졌다. 길을 막 건너려는데 누군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나는 유령이라도 만난 듯 깜짝 놀랐다.“회장님 와 계셔.”“어어 여긴 어, 어떻게…&
6장이별 1 “거짓말이지?”정식이 비틀거리면서 물었다. 배찬경은 정식이 쓰러지지 못하도록 곁에서 정식을 바짝 붙잡았다. 늦은 밤까지 순사주재소 창에서 비치던 불빛은 벌써 사라졌다. 정식과 배찬경이 막 나온 큰길가 옥화네 주막의 불빛도 두 사람을 몰아내고는 툭 꺼졌다. 배찬경이 정식에게 거짓말을 한 기억은 없었다. 다만 참말을 거짓말처럼 싱겁게 말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는지 참말을 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다.“자네 엉너리에 놀아나는 착한 이가 되고 싶지 않다니까. 왜 거짓말이라고 말하지 못하지?
5장 귀국과 생업 19“할아버지, 마지막 부탁이라니까요.”정식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낼 것처럼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형편이나 아뢰어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임을 안 지 이미 오래였다. 아무리 반항하더라도 결과는 모두 할아버지 뜻대로 결정되었다. 할아버지는 예부터 지켜 오던 관습과 규범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몹시 싫어했다. 금광 경영에 실패하고 나서 그런 경향이 더 완강해졌다. 할아버지가 눈길을 방문 밖으로 훽 돌리며 혀를 끌끌 찼다. 성을 낼 필요조차 없다는 듯 큰소리는 치지 않았다. 아버지를 묶어놓고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2장 4인조 결성(2) *4인조 밴드 첫 버스킹인가. 구보아저씨는 감쪽같이 젊은 록커처럼 변신했다. 여자의 설득으로 아저씨는 긴 머리를 약간 자른 뒤 펌을 하고 염색을 해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게다가 찢어진 헐렁한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를 받쳐 입어 세련되게 변신했다. 가면까지 쓰니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헤이, 록 앤 롤 보이!”구보아저씨 역시 록 스피릿을 의미하는 손가락 제스처로 왼쪽 가슴을 탕탕 친 뒤 팔을 공중으로 뻗었다.우리는 각자 마지막 공연 장비를 검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4인조 결성 8월 중순으로 접어 들었지만 푹푹 찌는 더위의 열기가 계속되었다. 한동안 정대 생각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반복된 일상을 무기력하게 보내고 있었다. 몇 가지 변화는 있었다. 레트로 가든의 물건을 정리해준다는 핑계로 그곳 소파에서 잠드는 날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구보아저씨와의 관계가 발전했다. 또 다른 변화라면 27클럽에 대해 여러 정보를 알게 되었고, 27클럽 회원들의 루트를 통해 루시퍼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놀라운 건 아직도 27클럽이 활발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건
5장 귀국과 생업 17 마당의 은행나무가 샛노란 이파리를 우수수 떨구었다. 한기를 품은 바람이 이파리들을 울타리 부근 구석진 곳으로 몰아갔다. 이젠 한낮이라도 밖에 있기가 부담스러웠다. 정식은 쌀가마니를 광으로 옮기는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배찬경을 맞았다.“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 웬일이야?”배찬경이 마당가 장의자에 정식과 함께 앉았다.“아내가 도둑 집에서 찾아온 거라네.”“도둑을 맞았다고?”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내는 며칠 전 장인을 찾아가 하소연 끝에 햅쌀 한 가마를 얻어왔다. 광에 둔 쌀이 없어진 것
5장 귀국과 생업 15 “입에서 똥물이 줄줄 나오도록 해줄까? 네 아비처럼 병신이 되도록 해줄까? 어서 대.”조선인 순사보가 멱살을 잡아 정식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정식은 쓰러진 채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렸다. 몸이 이미 방어할 본능조차 잃어가고 있었다. 볼이 찢어졌는지 몹시 따가웠다. 코피가 인중과 턱으로 흘러내렸다. 주위 바닥에는 벽지를 만들 종이 뭉치가 무너져 짓밟혀져 있었다. 벽지에 찍을 인동무늬 조각판들도 여기저기 마구 흩어져 있었다. 책상 서랍의 내용물들도 엉망진창으로 책상 위를 뒤덮고 있었다. 신문보급 공간이라기보다는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1장 손님 식당 뒷마당에 앉아 당근과 시금치를 다듬고 있었다. 며칠 째 커뮤니티 센터에서의 크고 작은 행사가 있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어제는 다문화 가족 교육 프로그램의 공연이 있었다. 그동안 가르쳤던 청소년들과 함께 첫 공연을 선보였다. 관객들은 아이들의 가족들과 주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반응은 좋았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자주 빠져 합주 연습이 힘들었지만 끝나고 나자 후련했다. 이틀 동안 꽉 찬 일정을 소화하느라 무리해서인지 어깨가 뻐근했다.여자는 요즘 쉼표에서 ‘푸른 밤, 푸른 하모니’ 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