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귀국과 생업

 

17

 

마당의 은행나무가 샛노란 이파리를 우수수 떨구었다. 한기를 품은 바람이 이파리들을 울타리 부근 구석진 곳으로 몰아갔다. 이젠 한낮이라도 밖에 있기가 부담스러웠다. 정식은 쌀가마니를 광으로 옮기는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배찬경을 맞았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 웬일이야?”

배찬경이 마당가 장의자에 정식과 함께 앉았다.

“아내가 도둑 집에서 찾아온 거라네.”

“도둑을 맞았다고?”

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며칠 전 장인을 찾아가 하소연 끝에 햅쌀 한 가마를 얻어왔다. 광에 둔 쌀이 없어진 것을 새벽에 밥을 지으러 나갔다가 알아챘다. 논에 말려놓은 볏단까지 훔쳐 가는 세상이었다. 약이 바짝 오른 아내는 동이 터오르는 고샅을 샅샅이 살폈다. 마침내 흔적을 발견했다. 가마니에서 샌 쌀알이 드문드문 길에 떨어져 있었다. 겁이 난 도둑이 그것을 치우느라 어느 새 빗질을 했건만, 빗질이 되레 자신이 도둑임을 드러내는 꼴이 되었다. 빗질은 상엿집 근처 외딴집까지 이어져 있었다.

“좀 모자란 사람이야. 불쌍하기도 하고. 주재소에 신고하겠다는 아내를 겨우 말렸어. 이따가 아내 몰래 쌀 한 말 가져다주려고 해.”

배찬경이 뜻밖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 때문에 치도곤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네. 미안하네.”

순사보에게 폭행당한 지 달포가 지났다. 몸은 어느 정도 아물었다.

“후지모토가 날 찾아온 걸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네. 자네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가지고 온 것 같았네.”

배찬경은 대답하지 않고 두루마기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정식에게 건넸다. 정식은 봉투를 받아들었다. 눈에 익숙한 것이었다. 정식도 배찬경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내는 부엌에서 덥힌 물로 아이들을 목욕시키는 중이었다. 의구심을 품고 봉투를 열었다.

정식 보시오.

한동안 큰 돌멩이를 목에 매달고 사는 것처럼 지내왔었소. 정식과의 언약이 나를 그리 힘들게 했었소. 모두 사사로운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내가 이룰 수 없는 것이었음을 이젠 다 터특했소. 부처님을 믿는다고, 존경한다고, 사랑한다고 부처님과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건 아니잖소. 아니 계신 때 없으시고, 아니 계신 곳 없으신 부처님처럼 정식도 내게 그런 존재로 모습을 바꿔 남아 있을 뿐이오.

생활은 어렵지만, 돈을 보내 준 고마운 마음만 간직하겠소.

순 올림

 

돈은 편지와 함께 동봉돼 있었다.

“내가 보냈단 말을 했군.”

“아니했네. 그래도 알더군. 너무 서운해하지 말게. 단념하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정식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오순의 마음에 가만히 닻을 내렸다. 너울이 너무 세고, 속이 너무 깊어 닻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어떻게 지내든가?”

“지난번에 말해 준 형편에서 특별히 달라진 것 같지 않았네. 병이 아직도 낫지 않았나 보더군. 사립문 앞에 서서 잠시 이야길 나눴을 뿐이네. 남편은 울타리 둘레에 옥수순지 뭔지 심으면서 꾸준히 눈길을 주더군. 주정꾼이라는 그 남편 말일세. 고향 동창이 왔다 해도 남녀 사이 아닌가. 오순은 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봉투를 내게 돌려주더군. 까닭을 몰랐네. 어서 몽상에서 깨어나게. 아무리 애를 태워도 이루어지지 않을 몽상일랑 내버려야 하지 않겠나.”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꿈이 계속되는 거네. 조선독립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 꿈을 도모하는 자네와 나도 다를 게 없네.”

정식은 돈 봉투를 배찬경의 손에 도로 쥐어 주었다.

“누이에게 줄 수 없다면 자네가 받게.”

순간의 결정이었지만, 망설이지 않아도 될 만큼 정식은 배찬경에게 오랜 시간 정신적인 부채를 지니고 있었다.

“내 꿈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자네 꿈은 이루어질 걸세. 나라 찾겠다고 일하시는 분들을 위해 써 주게.”

“허허, 식량까지 처가 신세를 지면서.”

“아내가 보면 허사가 되네. 어서 집어넣게.”

배찬경이 일단 봉투를 두루마기 주머니에 넣었다. 받고 싶어 받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눈에 띄어 사달이 날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그래, 몸은 어떤가?”

배찬경이 정식의 어깨를 두드리며 화제를 돌렸다.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네. 사랑은 함께 사는 시간에 일어나는 현상만이 아니라는 누이 말을 되새겨 보겠네. 그러다 보면 어느 틈엔가 가라앉게 되겠지.”

“그래 보게. 그리고 아무래도 앞으론 내가 자네를 만나지 말아야겠어.”

“자네가 돌아왔으니 더는 흉한 일이 생기겠나.”

“글쎄, 나도 이젠 여기를 영영 떠나야하지 않겠나 싶어.”

“영영?”

배찬경이 고개를 끄떡이며 일어났다.

“언제 떠날 건대?”

“아직 몰라.”

정식은 오랜 모색과 준비가 이제야 착수될 것이라는 암시 같아서 배찬경이 대견했다. 아무렴, 안중근도 있고, 이승훈도 있고, 한용운도 있지. 안중근과 이승훈은 장사꾼이었고, 한용운은 중이었다. 배찬경이 뭐가 모자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증을 함께 한 동무와 헤어진다는 생각과 혹시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겹쳐서 기분을 씁쓸하게 했다.

“애들 목욕을 끝낼 때가 됐네. 아내 인사도 받고 점심도 먹고 가게.”

배찬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되레 정식의 손을 잡아 대문 밖으로 따라 나오라는 듯 이끌었다. 돈을 돌려주려는 배찬경의 뜻을 정식이 모를 리 없었다.

“자네 꿈에 내 꿈도 얹혀 있다고 여기게.”

배찬경이 돌아서다 말고 정식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18

 

해가 앞산 마루에 걸렸다. 일(一)자로 찢어진 구름 사이로 붉디붉은 빛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산마루를 넘어서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정식은 아침참부터 옥화네 주막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눈길을 아무 데나 하염없이 주고서. 바지를 입지 못해 옥화네가 자기 입던 치마를 가져다주어서 잠방이 차림의 아랫도리를 감쌌다. 옥화네가 점심으로 준 국밥을 마다하고 김치를 안주로 막걸리만 마셨다. 어젯밤 돈과 술 문제로 아내와 다투었다. 애초부터 벼르고 있었던 듯 다툼은 이내 여자 문제로 번졌다. 아침까지도 여진이 계속되었다. 정식이 마당 구석의 변소에 들른 사이 분을 채 다 삭이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아내가 꼴 보기 싫다며 꿱꿱 소리를 질렀다. 방문까지 안에서 걸어 잠갔다. 정식은 자신의 행실에서 비롯된 다툼이었지만, 굽힐 마음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꼴도 보기 싫다니. 기가 막혔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각오를 아내가 망치고 있었다. 어쩌다가 내가 이 꼴로 내몰렸을까. 그런 비관적인 감정만이 가슴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동네 아낙들이 엿볼까 두려워 냅다 뛰어 옥화네로 왔다. 결국 다시 술집으로 내몰린 셈이었다. 아내는 이 시간까지 정식을 찾지 않았다. 어디 있는지 다 안다는 듯, 고생 좀 해보라는 듯.

“고모, 시인은 술을 좋아하나 봐요.”

“너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관심 딱 놓아라.”

옥화네가 주방 쪽에서 함께 안줏거리를 만들던 조카딸과 소곤소곤 나누는 말이 정식의 귓전에 파고들었다. 정식이 듣지 않도록 하려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들으면 어떠냐는 배짱도 한 가닥 담겼다. 옥화네 마음 씀씀이가 누런 벼 물결이 찰랑이는 너른 들 같았는데, 된서리를 맞은 것처럼 성큼성큼 시들어 가는 중이었다. 막 대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카딸은 얼마 전부터 옥화네에서 기숙했다. 지난여름 태풍이 몰아치고 큰비가 내렸다. 가까운 대령강과 청천강뿐 아니라 대동강과 한강도 범람했다.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해 나라가 시끄러웠다. 청천강이 지나는 안주에 사는 옥화네 동생네도 이재민 대열에 합류했다. 옥화네는 조카딸을 일시 거두어 허드레 일손으로 부렸다.

“어머!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나요?”

“저 양반이 마시던 술잔을 씻지도 않고 네가 입에 댔지? 냄새도 맡았지? 내가 안 본 줄 알아?”

“고모, 말을 마구 지어내지 마시라요.”

더는 말문이 막히는지 조카딸이 벌떡 일어나 고모를 쏘아보았다. 조카딸은 옥화네 방에 놓여 있는 시집을 읽었고, 작가가 정식인 것을 알아챘다. 정식이 옥화네 주막에 올 때마다 정식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유독 정식에게만 술을 따르는 등 안 해도 될 행동을 했다. 시인은 모두 고상한 인품을 가진 시 속의 주인공이라는 환상에 빠진 듯했다. 손님들이 다 가고 정식만 남을 때면 정식이 들으라는 것처럼 정식의 시를 한두 구절씩 외웠다.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 아닐까 착각이 들도록 정식에게 스스럼없는 눈빛을 보냈다.

“이년아, 정신 똑바로 차려. 저 양반 치마 입고 앉은 꼴을 봐라.”

옥화네가 조카딸 등 뒤에 대고 타일렀다. 정식이 자리에 없다면 절간 돌탑같이 쌓인 외상값을 등이 휘어지도록 짊어지고도 술만 처먹으면 헤벌레 웃는 인간이라는 말이 뒤따랐을지 몰랐다. 그래. 시인이 술을 좋아하지만, 시가 술값을 대지는 못하지. 조금 지나면 아내에게 매 맞았다는 소릴 듣게 될 거야. 소녀야, 정신 차려라.

“지국장 양반, 얼른 집으로 가오. 손님들 올 시간이오. 동네에 소문이 짜하게 퍼지겠소.”

옥화네가 조카딸과 대치하는 어색함을 얼버무리려는 듯 정식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가긴 가야지. 하지만 아침에 내달려온 것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여겨졌다. 다시 그런 식으로 내달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옥화네가 집에 가서 아내를 달래 주면 좋으련만. 바지라도 가져다주면 한숨 돌리겠구만. 정식은 그런 부탁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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