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숲 작가

[삽화 = 조민성 화백]
[삽화 = 조민성 화백]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14장 비밀(2)

 

*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가는 길에 여러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다. 넋이 나간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그냥 멍했다. 미로를 간신히 빠져나왔나 싶었는데 다시 제자리로 와 있는 것처럼 암담했다. 당신이 내게 보여준 강력한 권력과 속박의 권한은 허공에 뜬 나무에서 비롯된 것처럼 근본이 없는 것이었나. 빈 좌석에 앉아 맞은편 유리창에 시선을 둔 채 생각에 잠겼다. 몇 개의 역을 지나쳐 지하철은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빛이 날카롭게 유리를 통과해 오른쪽 눈을 따갑게 찔러댔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고 좌석이 빽빽하게 들어찼지만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여러 개의 신발들이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꿈을 꾸기 시작한 시점부터 나는 깊은 늪에 빠졌던 걸까. 꿈은 대체 누구의 것인가. 이곳을 가득 메운 저 사람들의 꿈은 무엇이고 그 꿈은 누구의 것일까. 스스로 꾸는 꿈이라 믿었던 것이 정작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대신 꾸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 당혹의 순간을 어떻게 견딜까. 누군가 어깨를 툭툭 쳤다.

이봐 젊은이, 아까부터 계속 서서 기다렸는디 너무 하는구만. 팔십도 넘은 노인이 계속 서 있는디.”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모르는 사이 당신의 회사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마침 당신은 자리에 있었다. 내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하듯. 전처럼 강제로 끌고 오지 않고 지금까지 나를 내버려 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신의 왕국은 여전히 욕망의 기류가 곳곳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심호흡을 했다. 당신의 충실한 개인 최 실장은 문 옆에서 대기했다.

왔으면 잘못을 비는 게 순서지, 멀뚱멀뚱 서 있으려고 온 거냐!”

아버지, 제가 누굽니까?”

유에스비는 가져 왔겠지?”

제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웬 말장난이냐.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고 유에스비나 줘봐.”

안 가져 왔어요.”

그럼 왜 온 거냐! 그게 어떤 자료라고 함부로 들고 다녀? 에잇 저런 멍청한 새끼를 자식이라고 여태 뼈 빠지게 키우다니, 쯧쯧.”

인생 헛사셨다고요? 예 그러시겠죠. 왜 살인자라는 소린 빼시죠?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예전에 그 기타 주인, 기억하시죠? 그 사람 죽은 거 맞아요?”

이 새끼가 지금 뭔 개소리야?”

내가 죽였다던 그 기타 주인! 죽은 거 맞냐고 물었어요!”

당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은 이 정도의 일로 흔들리거나 무너질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당신은 인상을 쓰며 많이 참았다는 듯 거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평생 똑같은 지겨운 레퍼토리. 당신이 일궈온 신화를 전면에 내세워 나를 공격하고 박살내어 자신의 앞에 굴복시키려는 지겨운 수작. 인간으로 키우기보다 짐승으로 키우려는 지겨운 속셈. 끝내 변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변화시킬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체념하는 것이 현명했다. 굴복이 아닌 체념. 변하지 않는 대상 앞에선 체념이 가장 어울렸다.

평생 감옥에서 썩을 놈을 구해놨더니, 이 새끼가 물에 빠진 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네!”

그만 좀 하세요! 언제까지 덮을 수 있다고 보세요?”

야 이 새끼야 내 자식 아니었으면 넌 진작 내 손에 죽었어!”

당신은 오로지 얼마 전까지 회사 거래 내역이 담긴 유에스비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살을 시도했던 물류업계 하청업자에게 매달 받아온 비자금 내역은 물론이고, 여러 거래처에서 부당하게 착취해 온 자금 내역이 담긴 자료였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료가 유출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을 거라 믿을 것이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능력은 내가 벌여놓은 일을 깔끔하게 해결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일처리를 정확하게 처리하는 성격인 당신은 혹시 모를 후폭풍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만약 유에스비 내용이 유출이라도 된다면 당신이 세운 왕국에 또 다시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나는 유에스비에 담긴 내용으로 당신에게 작은 복수 정도는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옭아맨 살인자라는 올가미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무서운 칼날이었다. 당신이 들이댄 칼날을 피하려면 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 외엔 없었다. 그것만이 최선의 복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당신은 화를 주체하지 못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급기야 탁자를 쾅쾅 내리친 뒤 옆에 세워진 골프채를 집어 들었다. 당신은 골프채를 단단히 쥐고 내게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당신의 눈동자 안에서 나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악을 떠올렸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빼앗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당신의 악행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 시킬 수 없으리라. 당신은 최 실장에게 나를 끌어다 앉히라고 명령했다. 강제로 바닥에 앉혀진 나는 소리를 질렀다.

이제 그만 하세요!”

최 실장은 당신이 맘껏 골프채를 휘두를 수 있게 한쪽으로 몸을 비켰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어디서 그런 힘이 치솟은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위로 치켜든 당신의 팔을 붙잡아 골프채를 빼앗았다. 당신이 내게 했던 것처럼 나는 골프채를 위로 치켜들어 몇 차례 당신을 향해 내리쳤다. 당황한 당신이 으헉 비명을 질렀고 최 실장이 뛰어왔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여 공을 날리듯 당신을 향해 마지막 채를 휘둘렀다. 당신의 몸 어딘가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바닥으로 거꾸러졌다. 쓰러진 당신의 주변으로 피가 검게 번졌다.

 

*

여자는 전보다 더 의욕적으로 공연을 추진했다. 꼭 병원비 때문은 아니었다. 나 역시 여자와 같은 마음이었지만 전처럼 의욕이 생기지는 않았다. 나는 매일 레트로 가든에서 지냈다. 이곳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탁자와 의자를 밖으로 꺼내놓고 그 자리에 초록 소파를 들여와 침대로 사용했었다. 구보아저씨가 없는 가게는 텅 빈 밤거리처럼 쓸쓸하고 황량했다. 전에는 하나하나 의미가 있어 보였던 물건들은 그저 버려진 물건들처럼 쓸모가 없어 보였다. 아저씨는 왜 저런 물건들에 집착했던 걸까. 내가 물건을 모두 정리한 이후에도 아저씨는 또다시 잡다한 물건들을 많이도 모아 놓았다.

이따금 아저씨가 돌봐주던 길고양이인 검은 고양이가 찾아와 가게 안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사라졌다. 아저씨가 개조해 놓은 기타들을 쳐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흥을 느낄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가 이어졌다. 기타 루시퍼는 어디에 숨겼을까. 왜 숨겨야만 했을까. 아저씨는 루시퍼 기타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침입자와는 어떤 관계일까. 구보아저씨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한 겹의 물결이 겹겹의 파도를 몰고 오듯 의문에 의문만 층층이 쌓여갔다.

나는 피습에 관해 여러 방향에서 추리를 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 구보아저씨의 의식이 잠겨 있는 상태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궁금증과 걱정은 임계점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끓어올랐다. 만약 아저씨가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면? 기타의 정체 역시 영원히 묻혀 버릴 것이고, 아저씨를 그렇게 만든 범인에 대해서도 묻혀버릴 것이다. 나는 머리에 벌레라도 붙은 듯 재빨리 생각을 털어냈다. 여자가 그날 했던 말들이 수시로 복기 되어 머릿속을 헝클어놓았다.

구보아저씨는 평생 기다린 거예요.”

누구를요?”

구보아저씨 땜에 인생을 송두리째 망친 사람.”

인생을요? 대체 그 사람이 누군데요?”

그건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아저씨는 평생 어떤 죄책감을 안고 떠도는 삶을 살았던 거예요. 당신의 잘못만은 아닌데 모든 걸 떠안고 산 거죠.”

여자는 스무고개를 넘는 듯한 말투였다.

아 답답해.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봐요.”

인생을 통째로 빚지거나 송두리째 망쳤다는 극단적 표현을 그렇게 쉽게 써도 되는 걸까. 나는 통째로송두리째의 엄청난 무게를 가늠해 보고자 그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 어느 정도의 무게이기에 인생을 한정된 단위 안에 모조리 쓸어 담으려는 걸까. 대체 어쨌기에? 아무리 가늠해 보려 해도 감각이 둔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나는 어떤 쪽에 속할까. 당신에게 통째로 빚진 쪽? 아니면 송두리째 빼앗긴 쪽? 어떤 쪽이든 억울한 마음은 같았다.

 

*

초록 소파에 앉았다 누웠다 하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구보아저씨를 떠올렸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저씨의 모습을, 그 시간들을 떠올렸다. 나 역시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아저씨의 기다림과는 종류가 달랐다. 그가 누구이든 다시 올 것이다. 범인들은 행위의 완성을 위해 범행 현장에 꼭 다시 나타나는 법이니까. 그게 루시퍼를 차지하기 위한 범죄라면 더더욱 나타날 것이다. 꿈속에서 고양이가 발가락을 물어뜯었다. 비명을 내지르며 잠에서 깼다. 어디선가 고양이가 잠꼬대를 하듯 나른하게 몇 번 울다 갑자기 점점 사납게 울어댔다.

불이 안 꺼져서 들어와 봤는데 문도 안 잠그고 자고 있네. 그냥 갈 걸 괜히 깨웠나 봐요.”

여자는 소파 끝 팔걸이에 걸터앉아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내게 말했다.

그냥 자요. 잠깐 앉았다 갈 테니까.”

여자는 손에 쥔 편의점 봉투에서 맥주캔 하나를 꺼내어 뚜껑을 땄다.

나는 소파에 기대고 앉아, 잠 깼어요, 라고 말하는데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잔 탓이었다. 눈을 비비고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현실과 꿈의 두 경계를 오가느라 정신이 몽롱했다.

구보아저씨가 있었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사고 나기 며칠 전에 여길 공연장으로 바꾸고 싶다고 그랬거든요.”

아저씨가요?”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러나 어느새 다시 잠속으로 서서히 밀려 들어갔다. 잠결에 여자의 손을 잡았다. 손의 온도가 기분 좋게 따뜻했다.

평생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게 될 줄 몰랐다고, 그만하고 싶대요. 그 자가 오면 과거의 일은 다 잊고 옛날처럼 같이 연주나 하자고그러고 싶다고……

여자는 이후로도 계속 말을 한 건지 내가 잠든 걸 눈치채고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속수무책 잠이 이끄는 대로 빨려들어 결국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나 잔 걸까. 무엇인가 바닥으로 세게 부딪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무거운 철재 종류의 소리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걸 보니 한밤중인 것 같았다. 창문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공터에 세워놓은 수많은 바람개비가 바람에 츠르륵츠르륵 소리를 냈다. 뭔가 세찬 바람에 떨어진 건가.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았다. 암적응까지 한참 걸렸다. 실내등은 누가 껐지, 여자가 끄고 간 걸까, 여자가 다녀가긴 한 걸까, 난 불을 끈 기억이 없는데, 그런 생각들을 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의 촉수가 곤두섰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전기 스위치가 있는 쪽으로 가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출입문의 유리창은 미로에 막혀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주변을 더듬거리며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출입구 쪽에서 신중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소리가 나지 않게 입으로 호흡을 길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놈이 나타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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