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귀국과 생업

 

15

 

“입에서 똥물이 줄줄 나오도록 해줄까? 네 아비처럼 병신이 되도록 해줄까? 어서 대.”

조선인 순사보가 멱살을 잡아 정식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정식은 쓰러진 채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렸다. 몸이 이미 방어할 본능조차 잃어가고 있었다. 볼이 찢어졌는지 몹시 따가웠다. 코피가 인중과 턱으로 흘러내렸다. 주위 바닥에는 벽지를 만들 종이 뭉치가 무너져 짓밟혀져 있었다. 벽지에 찍을 인동무늬 조각판들도 여기저기 마구 흩어져 있었다. 책상 서랍의 내용물들도 엉망진창으로 책상 위를 뒤덮고 있었다. 신문보급 공간이라기보다는 시나브로 벽지 제작소와 판매처로 전락한 지국 사무실에서 정식은 사환 아이와 함께 추석 대목을 준비 중이었다. 벽지는 연중 추석 무렵에 가장 잘 팔렸다. 순사보는 구둣발로 정식의 몸을 아무데나 차 댔다. 발부리에 걸린 돌멩이를 차 대는 것처럼. 보다 못한 사동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네 놈이 어찌 몰라? 네가 모르면 모르는 것 없는 귀신도 몰라.”

후지모토는 조금 전 몸종처럼 자주 데리고 다니는 순사보와 함께 지국 사무실에 나타났다. 다른 날과 달리 잔뜩 화가 난 것이 찌푸린 미간에서 알렸다. 그러고 보니 배찬경이 의주로 떠난 지 벌써 넉 달이 지났다. 평소와 달리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궁금했었다. 언제나 그렇듯 배찬경은 정식에게 제 행처를 세세히 말해 주지 않았다. 정식 또한 배찬경의 수상쩍은 나들이를 까다롭게 묻지 않은 것이 습관화되었다. 적적하면 술이라도 한잔 나눌 양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찾아가 만났을 뿐이었다. 그저 근황을 짐작할 뿐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배찬경이 생각나면 그런 전례를 염두에 두고 내심의 궁금증을 삭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더불어 배찬경을 안 만나고도 견딜 수 있는지 의지를 시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신을 만난 직후 없어졌잖소.”

후지모토는 배찬경이 정식과 무언가 긴밀히 논의하며, 정식도 배찬경과 같은 무리에 속한다는 의심을 품었음직했다. 하지만 사무실을 샅샅이 수색했는데도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이번에는 단단히 혼쭐을 내겠다고 작정했는지 순사보를 남겨 두고 문밖 구경꾼들을 내모는 척하며 밖으로 나갔다. 순사보에게 궂은 역할을 실행할 시간이 되었다는 암시임을 정식이 모를 리 없었다.

“의주서 일자리를 잡지 못했으면 거기 갈 일이 더는 없을 텐데 왜 자꾸 가느냐고? 만주에 있는 삼촌이란 놈을 만나러 간 줄 다 알아. 그러니 이리 오래 걸리지. 초여름에 간 놈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잖아.”

이번에는 순사보의 발길질이 정식의 옆구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정식은 몸을 한 번 비틀었을 뿐이었다.

“어이, 몸 여린 시인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리면 어쩌나.”

느긋하게 동네나 한 바퀴 돌고 왔을 후지모토가 열린 문으로 사무실 안을 넘겨다보았다. 후지모토의 뒤쪽 멀찍이 서 있는 동네 사람들이 다시 발돋움을 하거나 고개를 빼서 힐끔거렸다.

“배찬경이란 놈은 너 보고 싶어서라도 다시 올 거다. 즉각, 조용히 연락하라우. 네가 무슨 맘을 먹느냐에 따라서 네 운명도 바뀌는 거야.”

순사보가 후지모토의 눈짓에 후지모토를 뒤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다급한 발걸음 소리 끝에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서야 사동이 아내를 데리고 돌아왔는가 보았다.

 

16

 

“말해 보오. 뒤주에 넣어 둔 돈이 어디로 갔소? 순사가 돈까지 가져갔다고 하겠소?”

아내가 인내의 시간이 벌써 끝났다는 듯 벌컥벌컥 소리를 내질렀다. 평생 자기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살 사람이라고 정식은 여겼었다. 요즘은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절벽을 만난 사람처럼 굴었다. 돈을 찾는답시고 바닥에 집어 던진 벽지인쇄용 조각판들을 정식은 하나하나 주워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순사에게 맞은 탓에 다리가 자꾸 휘청거렸다. 어쩌면 아내가 보기엔 정작 정식 자신이야말로 절벽을 만난 사람처럼 굴고 있었을 것이다.

몸은 회복이 더디기만 했다. 의원은 뼈까지 다쳤다고 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정말 아버지 김성도처럼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맞은 데에 즉효라면서 똥물을 마실 것을 강권했다. 정식이 듣지 않자, 솔잎을 채운 병을 똥통 속에 넣어서 고이게 한 물을 직접 만들어 가져왔다.

정식은 이제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현실과 만나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기어코 이겨내리라 밤하늘을 바라보며 다짐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온 생각과 습관이 다짐을 자꾸 방해했다. 우울한 기분을 풀기 위해서 일부러 명랑한 표정을 짓고 아픈 몸을 이끌고 옥화네 술집을 찾아갔다가 다시 절망에 잠겨 돌아오곤 했다. 이 돈 저 돈 끌어다가 신문대금을 경성으로 올려보낼 때가 그중 가장 큰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신문사에서는 정식만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없다고 칭찬했다지만, 정식으로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약속과 의무를 회피할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게 어떤 돈인 줄 아오? 아버님이 주신 돈뿐이 아니오. 여러 집에서 낸 도배지값 선금까지 포함되어 있소. 재료 살 돈을 없앴으니 대목 장사를 어찌하겠소?”

옥화네 주막 술값은 자꾸 늘어났다. 주위에서 꾼 돈도 늘어났다. 그것이 또 이자를 쳤다. 살림살이를 지탱하기 버거웠다. 술지게미와 쌀겨를 먹는, 머잖아 기어코 닥칠 신세가 눈앞에 그려졌다. 과연 아내가 명실상부한 조강지처가 되어 줄까?

“또 그 여편네에게 또 돈을 보냈소? 그년이 나보다 뭐가 더 낫소? 내가 그년을 찾아가 얼굴에 양잿물을 확 뿌려 놓아야겠소.”

조각판을 치우던 정식은 문득 문밖 화단에 핀 연분홍빛 상사화를 발견했다. 오래 전부터 거기 있었을 터였지만, 이제야 새삼 눈에 들어왔다. 들으나마나 아는 말이며 옳은 말인 아내의 목소리를 귓전에 흘려들으며 상사화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잎이 돋아났을 때에는 꽃이 피지 않고, 꽃이 필 때에는 잎이 지는 비운의 화초. 없어서 크게 근심해 보지 않은 것들이 막상 요긴한 효용가치를 가질 때에는 사라져 버리는, 내 인생이 저것과 닮았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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