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귀국과 생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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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마지막 부탁이라니까요.”

정식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낼 것처럼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형편이나 아뢰어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임을 안 지 이미 오래였다. 아무리 반항하더라도 결과는 모두 할아버지 뜻대로 결정되었다. 할아버지는 예부터 지켜 오던 관습과 규범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몹시 싫어했다. 금광 경영에 실패하고 나서 그런 경향이 더 완강해졌다. 할아버지가 눈길을 방문 밖으로 훽 돌리며 혀를 끌끌 찼다. 성을 낼 필요조차 없다는 듯 큰소리는 치지 않았다. 아버지를 묶어놓고 패대던 모습을 떠올리면, 할아버지의 가족 사랑은 눈물겨웠다. 성냄은 사랑과 비례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다른 듯했다. 성냄이 사람을 집어삼킨 것 같았다.

“제 몫만 다 주십시오. 더는 달라는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맹세한다니까요.”

정식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달라는 것처럼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었다. 지금의 현실이 암담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세상 가장 후미진 곳에 콕 처박히고 싶은 지경이었다. 할아버지가 무엇이든 결정의 준거로 삼는 관습으로 보면 분가한 장손에게 재산을 배분하는 것은 할아버지의 당연한 의무였다. 정식은 그 마지막 수단을 꺼내든 것이다. 물론 이미 줄 만큼 주었다고 반박하면 재반박할 여지는 궁색했다. 하지만 정식은 대를 이을 장손. 가장 가까이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까지는 버리지 않았으리라. 그런 기대에 목을 매단 자신이 죽도록 싫어도 정식은 어쩔 수 없었다.

“경성 중앙방송국으로 자리를 옮긴 김억 선생이 며칠 전 지나는 길에 잠시 들렸었다. 네 스승이라는 게 창피한 지경이 되었다고 하더라, 이놈아.”

할아버지가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는 듯 정식을 등친 채 입을 열었다.

“뭐라더라? 음, 그렇지. 요즘 네가 ‘생(生)과 돈과 사(死)’, ‘돈타령’, ‘저급생활’, ‘술과 밥’, ‘옷과 밥과 자유’, 뭐 이따위 저급한 시나 쓴다더라. 순사한테 당한 일은 차치하자. 내가 어찌해서 이런 민망한 꼴들을 보게 됐는지 모르겠다.”

네가 딱 하나 자랑할 것이 있다면 문학일 텐데, 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문학에서조차 그따위냐는 힐난이었다. 김억은 정식을 위한답시고 정식이 쓴 시까지 거론하면서 정식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할아버지에게 은근히 당부했던가 보았다. 정식은 시작 발표를 김억을 통하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잡지사나 신문사 관계자들과 어느 정도 교류를 튼 상태였다. 자연히 시에 대한 김억의 충고나 수정이 끊어졌다. 그런데 차츰 잡지사나 신문사들의 원고 청탁이 없어졌다. 보낸 원고조차 실어 주지 않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정식은 근래에 쓴 시들을 기억 속에서 더듬어 보았다.

 

있을 때에는 몰랐더니

없어지니가 네로구나.

 

몸에 값진 것 하나도 없네.

내 남은 밑천이 본심(本心)이라.

 

있던 것이 병발이라

없더니편만 못하니라.

 

가는 법이 그러니라

청춘 아울러 가지고 갔네.

 

술고기만 먹으랴고

밥 먹고 싶은 줄 네 몰랐지.

 

색씨와 친구는 붙은 게라고

네 처권 없을 줄 네 몰랐지.

 

인격이 잘나서 제로라고

무엇이 난 줄을 네 몰랐지.

 

천금산진(千金散盡) 환부래(還復來)는

없어진 뒤에는 아니니라.

 

- ‘돈타령’ 일부

 

곤궁한 처지와 비관, 추악을 대중 앞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시적 상상력이 돈과 생활이라는 장막 뒤로 불현듯 사라졌다. 부끄러웠다. 할아버지 곁에 앉은 할머니는 다 내 탓이오, 라고 중얼거리면서 두 손을 모았다. 이젠 할머니도, 어머니도 정식의 편에 서지 않았다.

“이놈아, 술이 돈만 잡아먹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네 놈 잡아먹고, 자식 잡아먹고, 집안까지 잡아먹어. 네 놈이 지금 그 지경에 이른 걸 아느냐?”

“신문사 지국 일은 그만둔 지 오래되었습니다. 앞으론 착실히 가족을 돌보며 살겠습니다.”

정식은 바위처럼 굳어진 할아버지의 마음에 계속 곡괭이질을 해댔다. 삶에 새로운 출구를 만들어 줄 사람은 어제도 오늘도 할아버지밖에 없었다. 새로운 출구가 과연 행복한 미래의 출구로 연결될 수 있을지 불투명했지만, 어쨌든 아내와 어린 자식을 이끌고 그리로 내달릴 결심을 세웠다.

“남시에 논밭을 사겠습니다. 그쪽 땅값이 여기보다 헐합니다. 고리대금업이 유망하다던데 논밭을 사고 남은 자투리 돈으로 그것도 해보겠습니다.”

정식은 자신도 믿지 못하는 말을 했다. 하지만 말하고 보니까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야지, 해야 하므로. 신문사 지국 경영을 실패로 마감하지 않았던가. 고리대금업이면 어때? 정식은 이를 악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할아버지가 정식을 돌아보았다. 노여움이 가득 찼던 눈빛이 잦아들어 있었다. 상종할 대상이 안 되는 놈과는 마주 앉기조차 힘이 든 모양이었다. 그런 체념의 낯빛이 정식을 더욱 힘들게 했다.

“돌부처도 비웃겠구나. 백 번 천 번 부인했던 일이 현실화됐구나. 네가 집안을 일으켜 줄 것이라는 기대는 접었느니라.”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제대로 살아 보겠습니다. 두고 보싶시오. 이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것을 정식은 막았다. 무슨 말을 하든 믿지 않을 터였다.

할머니 또한 끌끌 혀를 찼다. 밖을 향해 어머니를 불렀다. 마루에서 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어머니가 문 안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나오너라.”

어머니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답답함과 미움이 함께 비꼈다.

“제 청을 들어주실 때까지 집에서 머물겠습니다.”

할아버지가 밖을 향해 가래침을 내뱉었다. 그때 누구나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아버지 김성도가 어머니 뒤에서 나타났다. 앞자락에 방금 내뱉은 할아버지의 누런 가래침이 묻어 있었다.

“정식아, 정식아.”

아버지는 가래침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식을 향해 손을 까불렀다. 마침 사랑방 앞을 지나가다가 정식이 보이자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정식은 어머니에게 이끌려 사랑방을 나왔다. 한꺼번에 뜻을 관철할 수 없다는 자각 사이로 더 이상 옛 시절의 갓놈이 아니라는 상념이 끼어들고 있었다.

정식이 뜰로 내려오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정식의 손을 잡아끌었다. 정식은 주춤주춤 아버지에게 이끌려갔다. 그러건 말건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여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안채 뒤 앵두나무 밑에 이르렀다.

“내가 여기에 조선총독 부하 놈을 파묻었다. 이걸 파내 찬경이 삼촌에게 팔아서 술 많이 사 먹어라. 나도 좀 나눠 주고.”

정식은 어이가 없었다. 어디를 봐도 사람이 묻힌 흔적은 없었다. 앵두나무 낙엽 속에서 일본 헌병의 계급장으로 짐작되는 노란 구리 조각이 삐쭉 고개를 내밀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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