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이별

4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집안은 어둠과 적막에 휩싸였다. 할아버지가 늦게까지 책을 읽곤 하던 사랑채에서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허청 처마 밑에 수북이 쌓여 있던 장작 더미도, 그 옆 빈터에 집채만 하게 자리 잡았던 짚 누리도 보이지 않았다. 농사 규모가 현격히 줄었다. 새경을 줄 수 없게 되자 십수 년을 함께 살던 머슴 팔복이도 떠났다. 앙상한 나뭇가지들과 정식의 두루마기가 바람에 맞서며 내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고요를 깨뜨렸다.

우두커니 서서 집안을 넘겨보던 정식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할아버지 내외와 부모님에 대한 인사를 그렇게 대신했다. 집에 들어갈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집안 어른들에게 연거푸 초라한 꼴만 보여주는 것이 싫었다.

걸음을 옮기다가 진흙이 묻은 구두를 희끄무레한 잔설에 털고 닦았다. 산길을 오르내리며 몇 번이고 마른 풀과 잔설에 비벼댔는데도 진흙이 구두 밑바닥에 두툼하게 붙었고, 적잖게 구두 안으로까지 딸려 들어왔다. 양말까지 젖어 질척거렸다. 두루마기 또한 여기저기 진흙이 묻고 처참하게 구겨졌다.

선산에 있는 증조할아버지 내외의 묘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아무래도 어른들께 인사를 올릴 시기가 온 것 같았다. 영혼은 늘 찾아오는 후손들을 기다린다고 했다.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과연 무슨 도움이 필요할까? 정식은 묘소 앞에 무릎을 꿇고 매질을 기구했다. 화를 참지 마시라. 절대 용서하지 마시라. 용서해서 저를 현재에 묶어 두지 마시라. 제발 과거와 끈질기게 이어진 현재가 아니라 현재와 완벽히 단절된 미래를 열어 주시라. 극장 안에 불이 꺼지면 완전히 딴 세계의 그림이 펼쳐지는 것처럼. 정식은 빌고 또 빌었다.

구두를 대충 털고 발길을 돌렸다. 올 때처럼 돌아갈 때도 밤새도록 걸어갈 작정이었다. 동구 밖으로 나가는 다리에 다다랐다. 그날은 삼현육각을 앞세우고 백마를 타고 이 다리를 건넜다. 하지만 이 다리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되고 말았다. 언 내에 잔설이 어슴푸레 보였다. 그날 저 내에서는 오리들이 어깨를 앞세우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도 눈 감고 귀 막고 앞으로만 나아갔더라면 지금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식은 무엇을 보던 자신의 처지에 견주고, 그 끝에서 가슴을 몽땅 차지한 자괴감과 마주했다.

다리를 건너자, 남산 위에서 별똥별이 하늘을 갈랐다. 가까운 데서 개가 컹컹 짖었다.

5

호롱불이 책상을 비췄다. 정식은 얼마 후면 남의 손에 넘어갈지 모르는 자기 집 서재에 홀로 앉아 편지를 쓰는 중이었다. 책상 위의 잉크에 살얼음이 지도록 추었다. 아내는 초저녁에만 불을 때고 그 뒤에는 아무리 추워도 군불을 지피지 않았다. 잔소리에 지친 듯 그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말 없는 말이 쌓이고 쌓여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정식은 명확히 알았다. 펜촉에 잉크를 찍어 입김을 호호 불어 녹였다.

김억 선생님, 산촌에 온 지 십 년이 지났습니다. 산천은 변함이 없어도 제 삶은 아주 그른 곳으로 흘러갔습니다. 세상이 저를 버리고 혼자서 달아났는지, 제가 세상을 따라가지 못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가족 모두 제게 입을 닫았습니다. 근처만 가도 얼어붙을 지경으로 싸늘한 냉기가 느껴집니다. 아내뿐 아니라 어머니조차. 선생님도 곁에서 저를 지켜보셨다면 다름 없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길을 놔두고 길 아닌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젠 독서도, 습작도 할 염을 잃었습니다. 그저 다시 잡기 힘든 돈만 풀풀 날려 보냈습니다. 언젠가부터 제 앞날에 어떤 궁금증도 갖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뻔한 것은 기다리면 되니까요.

정식은 편지를 쓰다 보니 실제 자신의 신세가 그렇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히 다가왔다. 어둠이 차지한 허공을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기왕에 시랍시고 써 놓은 글을 편지에 이어 적었다.

살아서 그만인가, 죽으면 그뿐인가,

살죽는 길어름에 잊음바다 건넜던가,

그렇다 하고라도 살아서만이라면 아닐 줄 압니다.

살아서 못 죽는가, 죽었다는 못 사는가,

아무리 살지라도 알지 못한 이 세상을,

죽었다 살지라도 또 모를 줄로 압니다.

이 세상 산다는 것, 나 도무지 모르갔네.

어데서 예 왔는고, 죽어 어찌 될 것인고.

도무지 이 모르는 데서 어째 이러는가 합니다.

……

슬픔과 괴로움과 기쁨과 즐거움과

사랑 미움까지라도 지난 뒤 꿈 아닌가!

그러면 그 무엇을 제가 산다고 합니까.

꿈이 만일 살았으면 삶이 역시 꿈일께라!

잠이 만일 죽엄이면 죽어 꿈도 살은 듯하리.

자꾸 끝끝내 이렇다 해도 이를 또 어찌합니까.

살았던 그 기억이 죽어 만일 있을질댄

죽어 하던 그 기억이 살아 어째 없읍니까.

죽어서를 모르으니 살아서를 어찌 안다고 합니까.

- ‘생(生)과 돈과 사(死)’ 일부

김억 선생님, 지금 제 심경을 더하지도, 보태지도 않고 솔직히 말씀 올립니다. 혹 눈살을 지푸리실 일이 생기더라도 부디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정식 올림

정식은 펜을 필통 위에 놓았다. 허공을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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