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이별

2

옥화네 주막 기둥에 걸린 호롱불이 주탁에 앉은 정식과 배찬경을 비추고 있었다. 배찬경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꾸 밖을 곁눈질했다. 몹시 불안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안이 밖보다 더 밝아 밖은 보이지 않았다.

“돈이 필요 없으면 안 찾아오려고 했어? 감시가 더 심해졌나?”

눈빛에 그답지 않게 애원을 담은 배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차대한 일이라도 생겼나 보지?”

배찬경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할 동무라곤 자네밖에 없는데, 어디 가려고?”

정식은 일제의 감시 아래에 있는 남시에서는 더는 못 살겠다고 한 배찬경의 말을 떠올렸다. 배찬경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정식도 질식할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배찬경과의 친분까지 더해져 그 정도가 덩달아 높아졌다.

“응.”

“난 할아버지가 조금 떼어준 전답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형편이야.”

“알아, 자네가 돈놀이를 한다는 것도. 다급해서 왔어. 나, 만주로 떠날 거야. 아무리 둘러봐도 자네밖에는 부탁할 사람이 없네.”

“결국 아주 떠나겠다고?”

정식이 놀라서 배찬경의 얼굴을 살폈다.

“조직이 탄로 났어. 내게도 곧 화가 미칠 거네. 후지모토란 놈의 다리라도 분질러 놓고 가고 싶지만, 가족들에게 미칠 화가 두렵네.”

정식은 배찬경의 굳은 표정에서 결연한 의지를 읽었다. 더불어 자신이 배찬경의 의지에 기생하는 벌레만 같았다.

“가족보다 민족이 위네. 안중근 의사 같은 이의 뒤를 따르지 못하는 내가 내가 보기에도 가소롭기만 하다네. 내일 당장 떠나려네.”

배찬경이 결심을 확인시켰다.

“뭐?”

“…….”

“아내와 애는?”

“당분간 본가에 가 있도록 했어.”

“어쨌든 심순애를 차 버린 이수일이 되겠단 말이로군. 얼마나 필요해?”

“3백 원쯤…….”

“그렇게 큰돈을? 어미 소 서너 마리 값이야.”

정식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사적 우정과 나라의 독립이 중요해도 새 각오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토지 문서를 마당에 내던지던 할아버지의 절망한 눈빛과 집안을 말아먹을 놈이라는 탄식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갚을 기약은 없어. 우리 집도 다 처분한 것 알지?”

“그 많은 돈을 다 어쨌어?”

“난 돈 쓸데가 없어서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잖나.”

배찬경은 분가하면서 차지한 전답 문서를 달포 전에 모두 팔았다. 그것이 본가에 알려져 큰 소동이 일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몽둥이를 들고 찾아와 배찬경을 때려죽이겠다고 펄쩍펄쩍 뛰다가 함께 드러누웠다고 했다. 후지모토는 배찬경이 전답을 판 돈을 만주의 독립군단체에 무기를 사도록 기부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열성이 말썽이 될 일일랑 당최 하지 않을 작정을 했어. 이 심란한 세상, 나도 정말 이악스럽게 살 거야.”

정식의 말이 자못 냉정했다.

“진작 그랬어야지. 아이(삼남 정호)를 또 낳으니 정신이 바짝 드는 모양이군, 할 수 없지.”

배찬경은 자신은 이악스럽지 못하더라도 정식은 그래야 한다는 듯 말을 받았지만,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배찬경이 풀어놓은 목도리를 찾아 목을 여몄다. 주탁을 딛고 일어섰다.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배찬경이 악수를 청했다. 정식은 받아주지 않았다. 자신의 옹졸함을 드러내는 행동 같아서 찜찜했지만, 배찬경과의 작별까지 덥석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배찬경이 손을 거두고 절뚝이며 주막을 나갔다. 정식은 고개를 숙인 채 배찬경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정식은 자신이 변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오순과 나빈이 각각 떠올랐다. 오순과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빈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김억도 눈에 어른거렸다. 그 두 분도 결국 배신의 대상이 될까? 시로 민족 정서를 널리 펴서 일제에 맞서는 힘으로 삼도록 하겠다고 자신을 현혹시켰지만, 건방을 떤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젠 배찬경과의 우정까지 사실상 배신이란 종착점을 앞두었다. 심란했다. 과거를 지울 수만 있다면 모조리 지우고 싶었다. 죄가 너무 깊었다. 자신의 삶의 가치가 그 죄를 상쇄하고도 모자랄 것만 같았다. 옥화네 조카딸이 주탁의 그릇을 치울 때까지 정식은 멍한 눈빛을 허공에 두고서 자리를 지켰다.

3

밖은 채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눈이 휘몰아쳤다. 정식은 눈보라를 피해 몸을 잔뜩 웅크리고 걸었다. 먼 데서 마주 오는 사람이 우련하게 보였다. 간격이 좁혀지자 상대의 모습이 점점 뚜렷해졌다. 두꺼운 동복을 차려입고, 큰 가방을 멜빵으로 묶어 등에 졌다. 가방 때문에 평소보다 심하게 기우뚱거렸다.

둘은 서너 걸음을 사이에 두고 멈춰 섰다.

“아침은 먹었어?”

정식이 먼저 말을 떼었다.

“고맙네, 쓸쓸히 떠나지 않게 해줘서.”

“어디로 해서 가나?”

“운산, 북진을 지나 수풍에서 압록강을 건널까 하네. 그게 여의치 못하면 혜산진에서 건너든지.”

“걸어서?”

“그럴 수밖에.”

“이걸 넣고 가게.”

정식이 신문지에 싼 것을 내밀었다. 배찬경이 영문을 모른 채 받았다. 정식이 돌아서서 배찬경과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뭐야?”

“이젠 내게 필요 없는 것이네.”

“돈?”

조금 전 정식은 안방에 있는 뒤주에서 아내가 숨긴 돈을 꺼냈다. 아내는 아랫목에서 젖먹이 아들 정호를 껴안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만약 깨어 있었다면 큰 소동이 벌어졌으리라.

“자네를 어찌 배반하겠나.”

“근심을 덜었네. 고마워. 근데 왜 돈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하지?”

“나도 먼 데로 떠날 작정이네.”

“나랑 같이 갈까?”

배찬경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해 보는 말로 정식의 말을 받았다. 설령 만주로 따라간다고 해도 막았을 사람이었다.

“자네는 다시 돌아올지 모르지만, 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려네. 만주에 가면 자네가 내 몫까지…….”

“농담이 지나치네.”

“이 세상이 지긋지긋해. 내 삶은 위선과 실패의 연속이었어. 사랑했지만 사랑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어. 배웠지만 배운 대로 하지 않았어. 가졌지만 베풀지 않았어. 의무를 잔뜩 짊어졌지만 방일했어. 지금은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네.”

정식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배찬경이 무슨 말인가 하려는데, 정식이 말을 막으며 악수를 청했다. 마침 갈림길에 다다랐다.

“조심해서 가게.”

배찬경이 히쭉 웃으며 정식의 두 손을 잡았다.

“정식 씨, 이 몸은 뜻을 펴려 광야로 간다네. 부디 변심치 말고 조국을 지켜 주게.”

배찬경이 잊고 있던 신파조로 말했다.

“독립이 되면 돌아오게.”

정식도 히쭉 웃었다. 배찬경이 북쪽 길로 걸음을 떼었다. 정식은 기우뚱기우뚱 걷는 배찬경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배찬경이 몇 걸음 옮기다가 멈춰 섰다. 고개를 갸웃하며 정식 쪽을 바라보았다. 정식이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배찬경이 다시 발걸음을 뗐다.

정식은 오랜 세월 천천히 자신을 잠식한 욕망이 불현듯 목줄을 움켜쥔 악마의 얼굴로 드러났음을 거듭 인정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절망 뒤에는 용기가 온다던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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