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11934년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남시정식의 아내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해가 창호지를 바른 창문에 넘실거렸다. 정식은 이불을 덮지 않고 두루마기를 입은 채 벽 쪽에 잠든 듯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요즘은 술 먹고 늦게 들어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곤 했다. 평소처럼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맡에 떨어져 있는 손바닥만 한 흰 종이가 눈에 띄었다. 오래전부터 남편이 지니고 다니던 생아편이 떠올랐다. 순사보에게 두드려맞은 이후 진통제로 복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 낫고도 궂은날엔 뼈가 수
6장이별4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집안은 어둠과 적막에 휩싸였다. 할아버지가 늦게까지 책을 읽곤 하던 사랑채에서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허청 처마 밑에 수북이 쌓여 있던 장작 더미도, 그 옆 빈터에 집채만 하게 자리 잡았던 짚 누리도 보이지 않았다. 농사 규모가 현격히 줄었다. 새경을 줄 수 없게 되자 십수 년을 함께 살던 머슴 팔복이도 떠났다. 앙상한 나뭇가지들과 정식의 두루마기가 바람에 맞서며 내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고요를 깨뜨렸다.우두커니 서서 집안을 넘겨보던 정식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할아버지 내외와 부모님에 대한 인사를 그
6장이별2옥화네 주막 기둥에 걸린 호롱불이 주탁에 앉은 정식과 배찬경을 비추고 있었다. 배찬경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자꾸 밖을 곁눈질했다. 몹시 불안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안이 밖보다 더 밝아 밖은 보이지 않았다.“돈이 필요 없으면 안 찾아오려고 했어? 감시가 더 심해졌나?”눈빛에 그답지 않게 애원을 담은 배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중차대한 일이라도 생겼나 보지?”배찬경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의지할 동무라곤 자네밖에 없는데, 어디 가려고?”정식은 일제의 감시 아래에 있는 남시에서는 더는 못 살겠다고 한 배찬경의 말을 떠올렸다. 배찬
6장이별 1 “거짓말이지?”정식이 비틀거리면서 물었다. 배찬경은 정식이 쓰러지지 못하도록 곁에서 정식을 바짝 붙잡았다. 늦은 밤까지 순사주재소 창에서 비치던 불빛은 벌써 사라졌다. 정식과 배찬경이 막 나온 큰길가 옥화네 주막의 불빛도 두 사람을 몰아내고는 툭 꺼졌다. 배찬경이 정식에게 거짓말을 한 기억은 없었다. 다만 참말을 거짓말처럼 싱겁게 말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는지 참말을 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었다.“자네 엉너리에 놀아나는 착한 이가 되고 싶지 않다니까. 왜 거짓말이라고 말하지 못하지?
5장 귀국과 생업 19“할아버지, 마지막 부탁이라니까요.”정식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낼 것처럼 다부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형편이나 아뢰어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임을 안 지 이미 오래였다. 아무리 반항하더라도 결과는 모두 할아버지 뜻대로 결정되었다. 할아버지는 예부터 지켜 오던 관습과 규범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몹시 싫어했다. 금광 경영에 실패하고 나서 그런 경향이 더 완강해졌다. 할아버지가 눈길을 방문 밖으로 훽 돌리며 혀를 끌끌 찼다. 성을 낼 필요조차 없다는 듯 큰소리는 치지 않았다. 아버지를 묶어놓고
5장 귀국과 생업 17 마당의 은행나무가 샛노란 이파리를 우수수 떨구었다. 한기를 품은 바람이 이파리들을 울타리 부근 구석진 곳으로 몰아갔다. 이젠 한낮이라도 밖에 있기가 부담스러웠다. 정식은 쌀가마니를 광으로 옮기는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배찬경을 맞았다.“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 웬일이야?”배찬경이 마당가 장의자에 정식과 함께 앉았다.“아내가 도둑 집에서 찾아온 거라네.”“도둑을 맞았다고?”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아내는 며칠 전 장인을 찾아가 하소연 끝에 햅쌀 한 가마를 얻어왔다. 광에 둔 쌀이 없어진 것
5장 귀국과 생업 15 “입에서 똥물이 줄줄 나오도록 해줄까? 네 아비처럼 병신이 되도록 해줄까? 어서 대.”조선인 순사보가 멱살을 잡아 정식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정식은 쓰러진 채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렸다. 몸이 이미 방어할 본능조차 잃어가고 있었다. 볼이 찢어졌는지 몹시 따가웠다. 코피가 인중과 턱으로 흘러내렸다. 주위 바닥에는 벽지를 만들 종이 뭉치가 무너져 짓밟혀져 있었다. 벽지에 찍을 인동무늬 조각판들도 여기저기 마구 흩어져 있었다. 책상 서랍의 내용물들도 엉망진창으로 책상 위를 뒤덮고 있었다. 신문보급 공간이라기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