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문경의 모텔에서 눈을 떴다. 어느덧 열 하루가 지나 있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도 빨리, 너무도 안타깝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은영은 일어나 앉아 소리를 낮게 죽여놓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일어났어?”

“응. 새 소리에 깼어.” 은영이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 세수를 하지 않아 부스스한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창밖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요란하게 지저귀고 있었다. 지저귀는 소리가 햇빛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짹짹, 째재재잭, 삐비비비비비…… 방안에 맑은 음(音)들이 가득했다.

나는 일어나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신기하지? 우리 들으라고 내는 소리도 아닌데 저 지저귀는 소리가 우리를 즐겁게 해.”

“그러게. 노래하는 것도 모르면서 자꾸만 노래를 하네.”

우리는 출렁이는 맑은 음(音)들 속에서 헤엄치듯 유쾌하게 장난을 치면서 세수를 하고 방안을 정리하고 옷을 입었다.

 

모텔을 나와 식사를 하고, 자동차에 기름을 넣고, 상주 방면으로 천천히 운전했다. 느릿느릿 풍경이 뒤로 지나갔다. 하천을 건너고 중부 내륙고속도로와 만나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문득 은영이 멀리 보이는 마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교회에 가고 싶어.” 하고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하얀 십자가가 보였다. 마침 일요일이었다.

조금 더 가자 마을로 들어가는 콘크리트 포장길이 나왔다. 나는 우회전 등을 켜고 콘크리트 포장길로 들어섰다. 길 양옆에 가로수로 심겨진 포플러 잎새들이 부는 바람에 몸을 뒤채며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골목골목을 통과해 마을 끝에 있는 교회 마당에 도착했다. 교회 마당에는 승합차 한 대와 승용차 예닐곱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담장 밑에 해바라기들이 보이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사택으로 보이는 작은 집이 보였다. 그 집 앞에서 강아지 한 마리가 혀를 길게 내밀고 졸고 있었다.

교회는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벽돌로 지은 똑같은 건축물일 뿐이지만 신에 대한 경건한 마음으로 신도들이 모일 때, 문득 ‘거룩한 장소’로 전환한다. 유령과 마귀와 불행을 몰고오는 이방인들은 이곳을 침범하지 못한다.

은영이 가방을 챙겨 들고 자동차에서 내렸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자 찬송가를 막 끝낸 사람들이 자리에 앉고 있었다. 우리는 입구 쪽의 빈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녀가 가방에서 성경책을 꺼내 펼쳤다.

목사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주제의 설교였다. 목사의 음성은 특별한 강세가 없이 물 흐르는 소리처럼 자연스러웠다. 나는 목사의 설교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창밖을 보았다. 땡볕을 받고 있는 해바라기꽃이 보이고, 또 담장 너머 울창한 숲이 보였다. 진초록으로 빛나는 나뭇잎들과 역광을 받아 연초록으로 빛나는 나뭇잎들이 숨막히도록 아득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바람이 미루나무 많은 이파리들을 쏴아 뒤집으며 조용히 지나갔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함께 봉독하는 것으로 목사의 설교는 끝이 났다. 이어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렸다. 모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은영은 더할 수 없이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를 드렸다.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는 걸까. 그녀의 얼굴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나는 문득 이십일 년 전 여름을 떠올렸다. 여주군 하천의 버드나무 아래서 은빛 하모니카를 연주하던 소녀. 어디선가 환청처럼 하모니카 선율이 들려오는 듯했다……♩~♬~~~♩♬~~♩~~♬~♩~~~♩♪…… 시간 밖이면서도 시간 안이었던 그 이상스런 시간. 절대시간, 혹은 영원이라고밖에는 이름지을 수 없는 그 낯선 시간…… 목구멍이 꽉 막혀 왔다.

오 하느님. 나도 모르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여자를 용서해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저에게 이 여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아무것도 마련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들은 것이 모두 사실인지, 아직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큰 뜻이 있어 이 착한 여자를 그토록 빨리 데려가시려는 겁니까. 이 여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당신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왜…… 이토록 끔찍한 어려움을 주시면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는 함께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부디 자비를…… 자비를…… 신이여,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소서…….

평생 그토록 간절히 기도한 것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예배가 끝나자 사람들이 다가와 우리에게 어디 사시는 분들이냐고 물었다. 은영은 상냥하게 웃으며 간단히 여행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식사를 하고 가라고 권유했다. 우리는 급히 가야 할 곳이 있다면서 자연스럽게 거절하고 교회를 나왔다.

다시 빈 골목을 지나고 포플러나무들이 심겨진 콘크리트 포장길을 지나 차도로 들어섰다. 도로 오른쪽 하천에 구릿빛으로 탄 여름아이들의 물놀이가 한창이었다. 눈부신 햇빛, 부서지는 물거품, 까르르 까르르 치솟는 웃음소리…… 온 세상이 새 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상주 방면으로 달렸다. 강원도 쪽에 비하면 도로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자동차가 상주를 지났다. 계속 3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경북선 철길과 만났다가 헤어지고 만났다가 헤어지면서, 아스팔트는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얕고 완만한 구릉과 끝간데 없이 펼쳐진 푸르른 들녘. 꼬불꼬불 흐르는 실개천이 보이고, 그리고 드문드문 마을이 보였다. 광활한 벌판에, 물줄기를 따라 마을을 이루어 모여 사는 사람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황하…… 나일…… 인더스…… 사람 살아가는 모양이 얼핏 장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우리가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배가 고파지고 있었다. 끼니때면 밀려오는 배고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인간은 끼니때면 밥을 먹고, 때가 되면 잠을 자야 한다. 때로는 귀찮고 때로는 치욕스럽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하루 두세 번 꼬박꼬박 치러야만 하는 엄숙한 제의인 것이다.

저 앞에 가든 식당이 보였다. 나는 자동차 속도를 줄여 식당 앞 잔디밭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식당에 들어가 쌈밥에 도토리묵을 주문했다. 그녀는 도토리묵과 계란찜, 탕평채, 그리고 나물반찬을 조금씩 느리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나는 자동차 앞에서 그녀가 화장실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잔디밭에서 오후의 햇살이 부서지면서 열기를 식혀가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가 “자기야아󰠏󰠏󰠏 ” 소리치며 달려와 내 품으로 확 달려들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실려오는 몸무게에 나는 휘청거리며 그녀를 안고 자동차에 몸을 기대야 했다.

“왜 그래?”

“좋아서, 좋아서……” 그녀가 내 뺨에 뽀뽀를 했다.

다시 자동차에 올라타 남쪽을 향해 달렸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붙잡고 싶은 하루해가 또 그렇게 속절없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해지는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어린 왕자는 해질녘 풍경이 좋아 하루에 마흔네 번을 구경한 적이 있다고 했다. 시몬느 베이유는 해가 진다는 말만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마당으로 달려나가 석양을 보며 열광했다고 한다. 그들은 행복하다. 그들에게는 내일이 있다.

황혼이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사라지고, 땅거미가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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