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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한 천사를 사랑했네> 33회 비와 하모니카, 결혼사진이 있는 풍경②
이군산  |  kj.lee@fi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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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08  16: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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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은영이 탈진한 듯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생수병 뚜껑을 따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물을 몇 모금 마시고 크리넥스로 얼굴을 닦았다.

트램폴린의 계집애는 계속 허공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힘에의 의지’ 그 자체가 생명이라던 니체의 말을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었다. 얼마든지 예쁘게 볼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그 순간 우리 앞에서 생명력을 과시하는 그 천진한 에너지 덩어리가 나는 밉기만 했다.

“뭐 좀 먹자.”

은영이 말없이 나를 따라 자동차에서 내렸다. 나는 차문을 닫고 그녀와 함께 골목으로 내려가 식당을 찾았다.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 꾸물꾸물한 하늘. 한적한 주택가 골목을 몇 블록 지나자 적당한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문에 영양밥과 사골 우거지탕을 한다고 적혀 있었다. 저기 어때? 하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아윽!”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양손으로 배를 싸안고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나는 멍청하게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냐…… 무…… 물 좀 갖다줄래?…….”

간신히 중얼거리며 그녀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약을 꺼냈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죽음의 세계와 한 뼘도 안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났다. 오, 이렇게 빨리는 안 돼. 난 아무 준비도 안 돼 있는데, 안 돼!

둑길로 뛰어올라가 자동차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허방을 딛는 것처럼 다리가 몇 번 휘청거렸다. 다시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그녀가 약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몸을 웅크렸다. 콧등이 시큰거리면서 눈앞이 흐릿해졌다. 나는 옆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안고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누구네 집일까, 담장 밑 화단에 심겨진 맨드라미가 고개를 꺾고 우울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금니를 악물고 최대한 몸을 웅크린 채 이따금 경련했다. 그 짧은 사이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솟아나고 있었다. 끙끙 고통을 참는 신음소리가 내 숨을 막히게 했다.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이렇게…… 조금 있으면…… 괜찮아져…… 병원…… 안 돼…….”

그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병원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알았어, 아무 데도 안 갈게. 걱정하지 마…….” 하며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고작 그것뿐이었다.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가 죽음 같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옆에 앉아 어깨를 토닥여주는 일밖에 없었다.

슈퍼 봉지를 들고 골목을 지나가던 40대 여인이 잠깐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없는 꾸물꾸물한 하늘.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는지…….

차츰 은영의 얼굴이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하얗게 탈색된 얼굴에 식은땀이 흥건한 상태였다. 나는 손수건으로 젖은 이마를 닦아주고 파래처럼 달라붙은 머리칼을 걷어주며 말했다.

“어디 들어가서 쉴래?”

“응…… 그게 좋겠어.”

투명에 가까운 파리한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두 눈이 물기로 그렁그렁했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일으켜 다시 자동차로 돌아갔다. 하늘은 조금도 맑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선읍을 벗어나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삼거리에서 별어곡, 사북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로 방향을 잡았다. 잿빛으로 낮게 내려앉은 하늘이 기어이 한두 방울씩 빗방울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토독, 토독, 토도도독…… 소리를 내며 빗방울이 앞유리창에 부딪혔다. 나는 이삼십 초마다 한번씩 앞 유리창의 빗방울을 와이퍼로 닦았다. 와이퍼가 지나갈 때마다 비에 젖어 검게 번쩍거리는 아스팔트 도로와 진초록 숲이 새롭게 드러났다. 운무 속에 크고작은 봉우리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길가에 깨끗해 보이는 모텔이 보였다. 나는 속도를 줄이고 찻길을 벗어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모텔은 비에 가라앉고 있는 듯 턱없이 조용했다. 키를 받아들고 계단을 딛고 올라가 키에 적힌 번호대로 객실을 찾아 들어갔다. 방은 넓고 깨끗하고 아늑했다.

은영을 침대에 눕히고 창가로 갔다. 블라인드를 걷자 비 맞는 푸른 들판이 보였다.

텔레비전 옆에 근처 식당의 광고성냥이 보였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성냥에 적힌 전화번호로 밥을 주문했다. 그리고 은영의 몫으로 잣죽과 싱거운 나물반찬을 따로 부탁했다.

베개를 조금 높게 하고 비 내리는 들판을 보며 눕게 했다. 그녀는 기력이 다 빠진 얼굴로 물끄러미 들판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에겐 모든 것이 다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새삼스레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렇구나. 바다도, 산도, 들도, 이 모텔방도…… 모두 다 마지막이구나. 삼라만상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들이구나.

은영이 가방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자동차에서 그녀의 가방을 찾았다. 다시 방으로 올라가는 도중 그녀의 가방을 열어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야윈 것만 빼면 그녀가 아직 위험한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술 받고 치료하면 나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가능하면 자살용 약을 찾아 만약을 위해 따로 빼놓을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방 안에는 병원의 처방을 받은 조제약말고도 여러 종류의 약들이 들어 있었고, 나로선 어떤 게 어떤 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모두가 통증을 줄이기 위한 약 같았고 또 어떻게 보면 조제약 말고는 모두가 극약 같았다.

어느새 방문 앞이었다. 필요이상으로 시간이 지체되면 그녀가 의심하고 가방을 조사할지도 몰라 약 찾기를 포기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녀가 가방을 받아 성경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종잇장 넘기는 소리와 창밖의 빗소리…… 책갈피를 넘기는 그녀의 표정이 항아리 속에 담긴 물처럼 고요했다. 아득히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창가로 가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창문을 열자 비 맞는 초원의 냄새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비 맞는 푸른 들판, 조금씩 리듬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나직한 음성, 이따금 뻐꾸기 울음소리…… 마음이 편안해졌다. 식사가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더 기다려야 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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