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오후 진안에 도착했다. 우리는 마이산으로 향했다.

멀리서 보니 우뚝 솟은 두 암봉(岩峰)이 얼핏 일부러 만든 인공 구조물처럼 보였다. 아무리 봐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1억 년 전까지만 해도 호수였던 곳, 그러나 4천만 년에 걸친 지각변동으로 서서히 솟아오른 거대한 역암 덩어리. 어떻게 보면 신령스럽고, 어떻게 보면 기괴해 보이는 천연 콘크리트 산(山).

탑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많이 기울어 있었다. 우리는 이리저리 이갑용 처사의 돌탑을 구경하다가 일본인으로 보이는 한 떼의 관광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천천히 숫마이봉 아래 있는 운수사까지 갔다가 돌아나왔다.

다시 진안으로 들어가 저녁식사를 하고 전주방면으로 차를 몰았다. 진안과 전주 사이에는 화심온천이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박하기로 하고 길가에 있는 3층 모텔로 들어갔다. 건물 겉모양은 서구식인데 특이하게도 객실에 창호지 바른 재래식 미닫이창이 달려 있었다. 우리는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알카리성 온천물에 몸을 푹 담갔다. 욕조는 매우 작았고, 그래서 그 작은 욕조 안에 벌거벗고 마주앉은 우리는 천진난만한 개구쟁이들 같았다. 개구쟁이들답게, 우리는 한동안 키득거리며 물장난을 했다. 욕조의 물이 첨벙첨벙 넘쳤다.

 

다음날, 열 시쯤 깨어나 도토리묵과 생두부 요리로 아침 겸 점심을 하고 전주로 갔다.

전주시내로 들어가 그녀와 함께 의류매장에서 반바지와 셔츠를 몇 장씩 샀다. 그녀는 갈색 반바지와 하늘색 노란색 티셔츠를 한 장씩 사고, 나는 회색 반바지와 흰색 티셔츠를 두 장 샀다.

의류매장을 나와서는 안경점에 들어가 그녀의 선글라스를 샀다. 그리고 덕진공원에서 연꽃 구경을 한 다음 현금인출기로 약간의 돈을 찾고, 노래방에 들어갔다. 은영은 노찾사의 <사계>를 부르고 산울림의 <청춘>, 로커스트의 <하늘색 꿈>, 박지윤의 <그대 그리고 나>를 불렀다. <소양강 처녀>도 아주 구성지게 불렀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데도 빰빠라빰~ 하고 높은 점수가 나올 때마다 팔을 치켜올리며 환호했다. 그녀가 마냥 즐거워했으므로 나도 마냥 즐거웠다. 지난 오 년의 공백은 일단 묻어두고, 없었던 것으로 치고,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노래방을 나와 식당에서 전주비빔밥을󰠏󰠏󰠏맛의 고장답게 비빔밥 한 그릇이면 충분할 텐데 반찬이 열 가지 정도 나왔다󰠏󰠏󰠏맛나게 먹고, 그런 다음 기름을 넣고 전주를 벗어나 다시 27번 국도를 타고 천천히 남쪽으로 갔다. 먼 하늘에서 뭉게구름이 번져가고 있었다.

서두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두르거나 서두르지 않거나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는 법.

간간이 논 가운데서 피를 뽑는 농부의 모습이 보이고, 여름 성경학교 플래카드가 보였다. 자동차는 기분 좋게 앞으로 밀려나갔다. 몇 번인가 작은 마을을 지나고, 휴게소를 지나고 호수를 지나고 다시 휴게소를 지났다. 어디쯤에선가 국도를 버리고 지방도로로 들어섰다. 그리고 십여 분 가량 달리자 다리가 나오고, 하천이 나왔다.

자동차 속도를 줄이고 핸들을 돌려 둑길로 들어가보았다. 둑길 양옆으로 달맞이꽃, 개망초, 강아지풀 따위가 마구 웃자라고 있었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오후 다섯 시가 넘었지만 아직 햇볕의 열기는 식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풀잎을 뜯어 허공에 날렸다. 먼 들판에 자전거를 타고 산아래 마을로 달리는 학생들 모습이 보였다. 하얀 백로 몇 마리가 긴 다리를 벼 포기 속에 숨기고 먹이를 찾는 모습도 보였다.

“물 참 맑다.” 하고 그녀가 말했다. “송사리 떼가 다 보여.”

그녀와 함께 손잡고 천천히 둑길을 걸었다.

“차 있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아무 데나 맘에 들면 멈추고, 가고 싶으면 가고…….” 그녀가 팔을 벌려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는 주말마다 그녀와 함께 자동차 여행을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들 한 걸음 앞에서 개구리 메뚜기가 이리저리 뛰고, 하루살이들이 허공을 날았다. 푸른 들녘을 지나온 저녁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둑길 아래 풀숲에서 개구리 몇 마리가 논두렁 옆 개울로 뛰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선선히 부는 바람에 조용히 드러눕는 풀잎들, 그 풀잎들마다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늦은 오후의 햇살…….

조금 더 걸어 모퉁이를 돌자 그곳은 완전히 적막강산이었다. 자동차 엔진소리도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언제 또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이승에서 한번 지나가는 길. 자동차를 타고 옆 도로를 지나가는 일은 있을지언정, 걸어서 이 땅을 밟고 지나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삶의 그 일회성이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풀밭에 벌렁 드러누웠다. 순간 기우뚱 쏟아지는 하늘…… 훅 끼쳐오는 풀냄새…… 머리맡에서 강아지풀이 간지럽게 흔들렸다. 단거리경주를 하듯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하는 도시에서의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팔을 벌려 온몸으로 하늘을 안았다.

“왜 그래?”

은영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좋아서…… 그냥 좋아서…….”

“그렇게나 좋아?”

“응. 온 세상이 내 집 같아. 이렇게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인생을 다 흘려보내게 된다 해도, 조금도 아쉽지 않을 것 같아.”

은영이 내 옆에 쪼그려 앉으며 풀풀 웃었다. 회색 칠부바지 밑단이 위로 당겨지면서 그녀의 무릎이 반쯤 드러났다. 그녀의 무릎에서 햇살이 하얗게 빛났다.

“고마워. 나 같은 여자 사랑해줘서.”

“나 같은 여자라니. 넌 내가 택했어. 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야.”

“나는 더 이상 싱싱하지 않아. 파릇파릇하지 않아.”

“바보. 나도 더 이상 싱싱하지 않아.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왜 그래.”

그녀가 생긋 웃으며 풀잎을 뜯어 내 입술을 간질였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피하다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옆으로 자빠뜨렸다. 결국 그녀도 내 옆에 벌렁 누웠다.

“아, 정말 시간이 여기서 멈췄으면 좋겠다…….” 그녀가 양팔 벌려 심호흡하고 말했다.

행복감이 조수처럼 밀려와 가슴을 벅차게 했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아직 그런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게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다. 햇빛도, 바람도, 들풀도, 모두 나의 행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성공이니 영광이니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지도 몰랐다.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가. 명성을 날리고, 돈을 벌고, 애국자가 되고, 그래야만 인생은 가치 있는 것인가? 갈대 나부끼는 강변 오두막집에서 오순도순 아이들 키우며, 자연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가치가 없는가? 그것들에 우열이 있는가?

아득한 옛날 여와(女媧)가 천하를 다스리던 시대에는 맹수나 독사들이 모두 발톱과 이빨과 독을 감춘 채 누구도 해칠 마음을 갖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어슬렁어슬렁 여유가 있었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떠돌며 특별히 추구하는 바가 없었다고 했다.

이천 년 전 예수는 또 이렇게 말했다. 들에 핀 백합을 보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했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이처럼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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