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서부터 꽃소식이 올라왔다.

윤중로에 벚꽃이 한창일 때, 아예 센터 일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병간호하기 위해 은영이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아버지는 계속 혼수상태라고 했다.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엄청난 병원비 마련하느라 온 식구가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 날 밤 그녀는 짐을 쌌다.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겼는데도 커다란 여행가방 두 개에 가득했다. 그녀는 힘들게 지퍼를 채웠다. 그 날 밤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날, 터미널까지 그녀를 바래다줬다. 그녀는 오랫동안 못 올 거 같다면서 나에게 부모님 계시는 화곡동 집으로 돌아가 있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말이 씨가 되는 것 모르냐면서,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사실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그녀도 오래 집을 비우게 되어 미안해서 그냥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나는 불안해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아버님이 쾌차하시면 올해 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식을 올리자고 했다. 그리고 티티카카로 신혼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기분 좋게 “콜!” 하고 버스에 올랐다. 티티카카는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위치해 두 나라가 나눠 가진 담수호 이름이면서, 우리가 자주 가던 홍대 앞 카페 상호이기도 하다. 홍대 앞 그 카페에서 우리는 나중에 신혼여행을 티티카카로 가자고 약속했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힘들 것 같아 나는 그녀의 통장에 약간의 돈을 보내주었다. 입금된 것을 확인했는지, 얼마 후 전화통화에서 그녀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 때문에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무슨 아르바이트?” 나는 물었다.

“할리퀸 소설 번역하는 거야.”

왕자, 혹은 그에 준하는 귀족 재벌 출신의 완벽한 남자와 부족하지만 착한 신데렐라 같은 여자의 비현실적인 사랑. 우연히 만난 그 남자, 알고 보니 어머어마한 부자였다! 사회의식은 물론 리얼리티마저 무시하고 여성독자들에게 대리만족이나 주는 그런 할리퀸 소설이 그녀에게 맞을지 염려스러웠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그냥 문장만 번역하는 거야. 스토리는 신경 안 써도 돼. 한 문장, 한 문장, 초벌 번역하면 출판사에서 교열 보는 사람이 앞 뒤 맞춰 깨끗하게 다듬어. 하긴 책 나온 거 보면 내가 번역한 데서 크게 달라진 것도 없지만.”

 

계절은 무심히 흘러오고, 또 그렇게 흘러갔다. 개나리 목련이 다 지고 장미가 봉오리를 벌렸다. 아카시아 꽃이 피었다가 지고, 여름이 왔다. 그동안 나는 주말을 택해 예닐곱 번쯤 대구에 내려가 그녀와 함께 밤을 보냈다.

그 해 7월 첫째 주말, 우리는 늘 그렇듯 밤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다 새벽녘에 지쳐 잠들었다. 다음에 내려오면 강정 유원지나 합천 해인사를 다녀오자고 했던 것은 나였던가, 아니면 그녀였던가. 잠결에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자기야, 자지 마. 이야기 해. 이제 헤어지면 언제 볼지 모르는데 이야기 해. 응?” 나는 비몽사몽간에 “으응……” 하고 중얼거렸고, 그녀가 계속 말했다. “정말 잘 거야? 두 시간 있으면 나 병원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환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아침에 병원에 갔다가 오후에 터미널로 배웅을 나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며칠 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없는 번호라고 나온 것이었다. 그 날 서울로 돌아오면서 추풍령 휴게소에서도 통화를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한 낌새가 보이지 않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휴대폰 번호밖에 모르고 있던 나는 갑자기 그녀를 찾을 길이 막막해졌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대구에 있는 종합병원이라는 것뿐, 병문안도 한번 가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녀의 아버지 성함도 몇 호실에 입원해 계신지도 몰랐다.

내가 얼마나 철이 없는 인간인지 그때 처음 깨달았다.

자꾸 나를 깨우고 이야기하자고 하던 마지막 밤이 생각났다. 그녀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걸까.

 

내가 아는 은영은 누군가에게 버림받는 일은 있을지 몰라도 누군가를 버릴 수 있는 여자는 아니었다. 분명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그녀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에게도 말못할 어떤 안 좋은 일이.

나는 급히 그녀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날마다 수신여부를 확인을 해보았다. 메일은 계속 읽지 않은 상태로 나왔다.

일주일쯤 기다리다 문래동 노동자 센터에 전화를 해보았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그녀의 휴대폰 번호와 당산동 옥탑방 주소밖에 모른다는 것이었다. 은영이 그렇게 말해달라고 부탁한 것 같았다.

휴대폰을 스스로 해지한 걸 봐서 사고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 쪽에서 나를 피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 친구 유인경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있었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찾는 일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나는 인터넷 웹서핑 이십여 분만에 그녀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생 수십 명의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물건들이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녀 쪽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정말로 나를 피하고 있는 건 아닌가 두려워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며 그녀 찾는 일을 막연히 뒤로 미루기만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그녀에게 또 메일을 보냈다가 ‘존재하지 않는 아이디거나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은 휴면 아이디’라는 메시지가 첨가된 반송메일을 받아야 했다.

여동생으로부터 내가 혼자 사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우리 집에서는 다시 들어오라고 계속 성화였다. 아무래도 내 꼴이 예전같이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잠깐 떨어져 있는 것일 뿐 헤어진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그녀가 다시 돌아오면 그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릴 테니 기다려 달라면서 버텼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자극 없는 시지프스적 일상의 되풀이. 금방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그렇게 오 년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어디든 그녀가 있었다. 한밤중 잠에서 깨어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 문을 열면, 거기 그녀가 있었다. 주방의 가스레인지를 켜면 역시 거기 옆에 그녀가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외국인 노동자 관련 뉴스를 보다 나도 몰래 고개를 돌려보면, 거기 어김없이 그녀가 미소짓고 있었다. 2호선 전철을 타고 당산역을 지나칠 때면 당산동 하늘 전체가 커다란 그녀의 얼굴로 보였다. 그녀는 바람 속에도 있었고 햇빛 속에도 있었다.

가끔 여자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사랑의 감정은 생겨나지 않았다. 내 가슴은 조금씩 사막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동안 여동생이 결혼을 하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바뀌었다. 나는 차장으로 승진을 하고 스페인과 체코, 앙코르왓, 북경, 그리고 볼리비아와 고도 2.400m에 위치한 페루의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다녀왔으며(티티카카 호수는 보지 못했다), 150여 권의 책을 사서 반쯤 읽었고, 저자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한 권 세상에 내놓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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