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너는 내 여자니까.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만화영화 <짱가> 주제가가 저절로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짜짜짜짜짱가 엄청난 기운이, 틀림없이 틀림없이 생겨난다, 지구는 작은 세계 우주를 누벼어라. 짱가, 짱가, 우리들의 짜앙가! 앞으로는 무슨 일 생기면 무조건 나부터 찾아. 알겠어?”

“알았어, 짱가.”

슬퍼하지도 말고 괴로워하지도 마. 무거운 건 내가 들어주고 슬프면 눈물을 말려줄 테니까. 언젠가 불행이 닥쳐 모든 사람이 너에게 등을 돌려도, 최후에 남는 한 사람이 있을 거야. 그 사람이 바로 나야. 너에게 행운이 왕창 쏟아져 네가 숨막히도록 기뻐할 때, 그때 가장 많이 기뻐해 줄 그 사람도 바로 나야.

남자는 자기 옆에 있는 여자에 의해 비로소 한 남자가 된다. 나는 순식간에 강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세상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해 마지막 날에는 힘들게 형의 자동차를 빌려 동해안으로 여행을 갔다. 자동차 가진 사람들은 모두 동해에서 새 천년 아침을 맞기로 작정했는지 영동고속도로는 한여름 피서철처럼 자동차로 붐볐다. 우리는 자동차 안에서 휴대폰으로 보신각 타종 방송을 보았다. 나는 서른세 살, 은영은 서른 살이 되었다.

2009년 1월 1일, 새해 아침, 정동진에서 일출을 맞으며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너만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 우리 결혼하자.”

“나보다 예쁘고 조건 좋은 여자들 많은데 왜?”

“그 여자들은 그 여자들한테 맞는 남자들이랑 결혼하겠지. 나한테는 네가 제일 예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 시선으로도 볼 수 없는 뭔가를 내가 누군가로부터 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린 아직 서로를 잘 모르잖아.”

“옛날영화 <애수> 본 적 있어?”

“애수? EBS에서 본 것 같기는 한데……,”

“거기서 남주 로버트 테일러가 비비안 리에게 이렇게 말해.”

“뭐라고?”

“‘결혼합시다.’ 그러니까 비비안 리가 이렇게 대답해. ‘나를 모르잖아요.’ 당연하지. 그때 그들은 겨우 세 번 만난 사이였거든. 그러니까 로버트 테일러가 다시 이렇게 말해. ‘당신을 알며 평생을 보낼 거요.’”

“웃겨.”

“인생이 원래 웃긴 거야.”

그녀는 내 프로포즈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들어가자 빠른 시일 내에 결혼하기는 힘들 거라고 슬쩍 발을 뺐다. 결혼준비를 해놓은 게 없고, 집안도 언니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당장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갑자기 전의가 불타올라 “그럼 식은 나중에 올리고 일단 합치자.” 하고 말했다. 나는 어서 빨리 그녀와 함께 같은 집에서 살고 싶었다. 더 이상 그녀를 추운 옥탑방에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위다우트 세리모니(Without ceremony)?…… 이렇게 말하니까 우리가 무슨 아나키스트 같네. 하긴 세리모니라는 게 쓸데없이 과시적이고 가식적이긴 하지. 특히 결혼 세리모니는 두 집안의 기싸움의 절정판 같기도 해.”

“콜?”

“몰라. 그럼 결국 아빠엄마를 속이는 게 되는데…… 아, 다 힘들다.”

그날 얘기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그녀는 풀 죽은 얼굴을 하고 아무런 답도 내지 못했다.

 

그녀가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으므로 일단 내뱉은 말, 나는 밀어붙였다. 주말마다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이는 그녀를 데리고 집을 보러 다녔다. 그녀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꼬박꼬박 따라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모아놓은 돈에 약간의 대출을 받아 연남동에 12평짜리 원룸형 오피스텔 하나를 전세로 얻었다.

집을 얻고 살림살이를 사기 위해 가구점과 마트를 왔다갔다 하다보니 이제 정말 함께 사는구나 실감났다. 은영은 여자답게 예쁜 그릇을 사오면 닦고 또 닦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집에서 책장과 컴퓨터를 옮겨왔다. 은영은 내 음반과 책들을 보고는 평생 심심하지 않겠다며 철부지처럼 즐거워했다.

나는 몇몇 친구들 외에는 누구에게도 동거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은영도 가장 친한 친구 유인경에게만 말했다. 은영의 중학교 동창으로 복스럽게 생긴 둥근 얼굴에 조용한 성격의 여자였는데, 직업은 초등학교 병설유치원 기간제 교사라고 했다. 은영의 짐을 옮기던 날, 유인경도 함께 왔다. 데이트할 때도 몇 번 함께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사랑하며 살았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은영과 나는 함께 잠들고 함께 눈을 떴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그녀와 함께 하고 싶어서 가능하면 책은 밖에서 읽고, 집에서는 하루 한 편씩 꼭 영화를 보았다. 퇴근길이면 캔터키 치킨이나 피자를 사서 식을까봐 코트 안에 품고 달려가고는 했다. 아침마다 기쁘게 브래지어 후크를 채워주었고, 어쩌다 그녀의 심부름으로 마트에서 생리대를 사기도 했다.

그녀는 여전히 신비한 여자였다. 십사 년동안 막연히 그리워하던 대상이기 때문이었을까, 볼 꼴 못 볼 꼴 다 보았으면서도 그녀에게는 아직 내가 알아낼 수 없는 뭔가가 남아 있었다. 뭔가 2%정도 부족했다. 그녀의 전부를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월계수가 되어버린 다프네처럼 아련히 하모니카 선율을 남기고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리곤 했다. 현기증과도 같은 내 영혼의 갈망에 그녀는 하루하루 새로웠다. 거짓말처럼, 우리는 자존심 싸움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었다.

 

“나 음식은 잘 못해. 그래도 정성으로 할 테니까 맛있게 먹어줘.”

나는 마초도 아니고 페미니스트도 아니다. 가능하면 여자가 해주는 요리를 먹고 싶어하는 평범한 이 시대 한국 남자다. 빨래라면 삶는 빨래까지 도맡아 할 수 있지만 요리만큼은 여자 몫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다행히 그녀는 요리하는 것을 싫어하거나 어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요리가 ‘무슨 일’인지 모른다고 해야 할까.

자취생활 오 년째지만 그녀의 요리실력은 솔직히 형편없었다. 반찬이야 사먹는다 해도 흔한 김치찌개 하나 칼국수 하나 제대로 못 끓였다. 무조건 맵고, 짜고, 시고…… 하여간 그랬다. 어떻게 여자가 남자보다 요리를 못할 수 있지?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만, 솔직히 나로선 충격이었다. 자취하는 많은 남자들처럼 그녀도 어쩌다 밖에서 회식할 때만 제대로 된 영양보충을 해온 것 같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찾아가며 함께 요리를 했다.

며칠에 한 번씩 우리들의 원룸에는 이런 풍경이 벌어졌다.

내가 파를 다듬거나 시금치를 다듬는 동안 그녀는 쌀을 씻고 도마질을 한다. 그러면서 서로 낮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장난을 치기도 한다. 집안의 유리창들이 김으로 뿌옇게 흐려진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집안에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고, 내 사랑하는 여자가 가끔 나를 향해 웃으며 왔다갔다한다. 그녀가 냄비의 뚜껑을 열어 간을 본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따뜻한 밥, 그녀가 무친 나물,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내가 끓인 찌개…… 식탁에 밥과 반찬을 옮겨놓고 앉는다. 일취월장하는 우리들의 요리실력에 우리도 놀란다. 식사를 하다가도 내가 “뽀뽀” 하면 그녀는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나 젓가락 쥔 양손을 허리 뒤로 하고 입술을 내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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