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할머니가 사랑한 宋 문공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旣爲人君 而又爲人臣 기위인군 이우위인신
이미 임금이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다 (<左傳> 문공 16년) 
宋나라 소공이 위기를 맞았을 때 다른 나라로 망명하라는 측근의 권고를 거절하며

송나라는 인의를 앞세우다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죽은 양공 이후 몇 차례 정변을 겪었다. 양공의 아들 성공이 뒤를 이은 뒤 17년 만에 죽었는데, 이 때 성공의 동생 어(御)가 제후 자리를 노려 성공의 태자와 대사마를 죽이고 스스로 제후가 되었다. 그러자 대부들이 반기를 들어 그를 죽이고 성공의 작은 아들 저구를 옹립하니 그가 소공이다.

그러나 소공은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 백성과 대부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군주가 권위를 잃어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니 민심은 들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공실의 구심점은 죽은 양공의 작은 부인 왕희(王姬)에게로 향했다. 왕희는 주(周) 천자의 딸이었고, 노 소공에게는 (피가 통하는 관계는 아닐지언정) 계보상 엄연히 할머니였다. 소공이 실망시킬 때마다 대신과 백성들의 눈은 왕희에게로 향했다.

왕희는 여러 공자들 가운데 소공의 아우인 포(鮑)를 특히 아꼈다. 포 공자는 관대하며 예를 아는 사람이었다. 나라에 흉년이 들자 자신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식량을 빌려주었는데, 나이 7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는 먹을 것을 무상으로 베풀고 가끔 진기한 음식도 보내주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육경(六卿=관아의 벼슬아치들)의 문을 드나들면서 우의를 도모하고, 환공 이래의 친족들까지 모두 챙기며 돌보아주었다. 나라의 재목이 될 만한 사람으로서 그를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는 소공을 대신하여 그가 제후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포는 용모 또한 단정하였다. 할머니뻘인 왕희가 포를 아끼는 마음은 윗사람으로서의 호감 이상이었다. <좌전>에 따르면 왕희는 포에게 개인적인 관계로 통정하기를 원했으나 포가 사절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사적 관계로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왕희는 이후에도 포 공자의 정치적 경제적 후견자 역할을 멈추지 않았다.

소공이 무도하여 국정이 계속 혼란스럽게 되자 왕희는 화원(華元) 화우 공손우 공손수 등 유능한 대부들로 하여금 포 공자를 시위케 하고 마침내 소공을 제거하였다. 

왕희는 11월에 소공으로 하여금 맹저라는 곳에 사냥을 나가도록 했는데, 소공은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라의 보물을 모두 가지고 떠났다.

그를 호위하던 사성 탕의저가 “왜 다른 제후들에게로 가서 목숨을 구하지 않으십니까”라고 건의하자 소공이 말했다. “내가 대부들에게 잘 하지 못하여 할머니와 백성들에게까지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어떤 제후가 나를 받아주겠는가. 또, 이미 군주였던 사람이 어디 가서 남의 신하노릇을 하겠는가. 차라리 죽는 게 낫다(且旣爲人君 而又爲人臣 不如死).”

소공은 가지고 나온 보물을 측근들에게 나눠주며 자기 곁을 떠나가도록 했다. 다만 탕의저는 충신이므로 끝까지 소공의 곁을 지켰다. 소공이 맹저로 향하는 도중, 미리 왕희의 밀명을 받고 기다리던 지역의 대부가 소공을 공격하여 죽였다. 탕의저도 이때 죽었다.

진(晉)나라는 송나라에 정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즉각 인근의 제후들을 규합하여 달려왔으나, 송나라에서 사태가 신속히 수습되고 공자 포가 새 제후가 된 것을 보고 돌아갔다. 막후에 있는 실권자에 의해 모든 일이 계획되고 실행되었기 때문에 권력 재편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야기 PLUS

권력의 이동에는 후유증이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아직 젊은 군주를 죽이고 힘으로 갈아치울 때는 부작용이 따를 수도 있다.

먼저, 제거된 소공의 아들이 환공 이래의 친족들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새 군주 문공은 그들을 제거해야 했다. 모두 한 혈육이었지만 정권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친소관계에 따라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나라밖으로 추방했다.  

앞서 진(晉)나라가 제후 살해의 책임을 묻기 위해 달려왔다가 돌아가긴 하였으나, 그것으로 송 문공에 대한 중원의 양해가 다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본래 송나라에 감정을 품고 있던 초나라가 끝내 이 사건을 구실삼아 공격을 가해왔던 것이다.

어떤 반란은 성공하고 어떤 반란은 실패한다. 성공하면 나라를 훔친 큰 도둑이 되어 혁명군주로 불리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어 일가가 멸족을 당하고 만다. 어떤 반란은 성공하고 어떤 반란은 실패하는가. 그 성패 여부는 무엇보다 민심에 달려있다. 백성이 지지하는 권력은 다른 사람이 뒤집기 어려워, 설혹 반란이 순간의 성공을 거둔다 해도 곧 진압되지만, 백성이 지지하지 않는 권력은 몇 사람이 작당해도 손쉽게 뒤집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백성’, 즉 민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소공은 대부들에 의해 잠시 권력을 잡았지만, 졸렬한 정치로 민심을 얻지 못하자 손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당장 권력을 잡을 수 있는 힘과 수단이 있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민심을 잡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민심의 지지를 받는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그 과정에 문제가 좀 있었더라도) 이웃나라들이 함부로 관여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뻘인 왕희가 포를 아끼는 마음은 윗사람으로서의 호감 이상이었다. 왕희는 포에게 은밀히 통정하기를 원했으나 포가 사절했다. 왕희는 이후에도 포 공자의 후견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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