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귀국과 생업

 

 

13

 

길가 쪽으로 난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누군가 지국 사무실로 들어왔다. 정식은 신문 뭉치들을 사무실 한쪽 구석으로 옮기던 중이었다. 아직 구독자를 찾지 못한 신문 뭉치들이 사무실 한쪽 벽을 절반 높이를 넘겨 채웠다. 정식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지모토 순사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서 있었다.

“정식 씨, 당신이 민요시인이오? 민요라, 민요…….”

정식은 일을 멈추고 책상 앞에 앉았다. 지난해 《개벽》(1925. 4)에 실렸던 김기진(八峰 金基鎭)의 평론 ‘현시단의 시인’을 기억해 냈다. 정식이 요즘 쓴 시들에 관한 것이었다. 후지모토가 문학지를 구해서 읽었을 리는 만무했다. 정식 사무실에서 집어 간 시집을 읽고서 그런 말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어디서 뒤늦게 주워들었을 터였다. 시집 󰡔진달래꽃󰡕이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 탓에 정식의 시에 대한 김기진의 평론이 문단 일각에서 다시 회자되었다.

 

김소월 씨 - 이 사람의 시인으로서 본령은 가벼운 민요적 서정소곡에 있지 아니한가 생각한다. …… 시에 나타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조선 재래의 민요적 리듬과 그 부드러운 시골정조이다. 이 이외의 아무것도 없다. …… 따라서 그의 본령이 민요적 서정시인에 있다 함은 망발이 아니다.

 

정식은 비평가들이 이젠 대놓고 자신을 민요시인으로 부른다고 속으로 푸념했었다. 다행히 󰡔진달래꽃󰡕을 읽은 경성의 학생들로부터 적잖은 편지가 왔다.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다른 남학생을 사귀자 실의에 빠진 어떤 남학생은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자하지 못하였구나’라는 시구를 빌려 자신의 한탄을 고백했다. 나빈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좋아하던 남학생과 헤어지면 꽃잎을 밟는 의식이 유행이 되었다고 전해 왔다. 눈 밝은 문인들은 김기진의 혹평을 비난했다. 정식은 이런 반응을 위안 삼는 중이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거요? 내 시집을 읽어 보기나 했소?”

정식은 되레 김기진의 혹평에 자신을 얻어 대꾸했다. 후지모토가 제멋대로 정식의 앞 의자에 앉았다.

“실망했단 말이오. 민족시인이라 했으면 난관에 봉착한 우리 거래가 수월하게 풀렸을 것 아니오. 민족을 찾는 놈들은 장래 독립운동에 투신할 조짐이 농후하니까. 흐흐흐.”

“나 같은 사람까지 독립운동을 한다면 조선사람 모두가 독립운동가일 것이오.”

후지모토는 2, 3일에 한 번꼴로 정식을 찾아왔다. 순사주재소에서 정식을 감시한다는 사실은 남시에서는 골목 꼬마들까지 알 정도가 되었다. 그것이 팔뚝에 완장을 찬 사람처럼 정식을 남달리 돋보이게 했다. 자연 주변 사람들은 위엄이 서린 어른이나 되는 듯 우대하거나 불량배나 되는 듯 기피했다. 후지모토는 거기에다가 네가 수락하지 않고 견디나 보자는 심보로 지치지 않고 1년 넘게 지속해서 부탁을 일깨웠다. 그런 태도를 보면 안 들어줘도 될 것 같기도 했고, 나중에 큰일이 생기지 않을까 근심이 일기도 했다. 정식은 들어주지 않기로 한 결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네가 지치지 난 안 지쳐.

“왜 몰락한 왕조를 못 잊는 민족시인처럼 삐딱하게 노시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내 제안에 쌓인 먼저를 이젠 떨어낼 때가 되지 않았소?”

정식에게 다가온 후지모토가 옆구리에 찬 장칼 자루를 잡아 책상 옆구리를 툭툭 쳤다.

“저기 쌓인 신문을 보시오. 구독자가 몇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내가 구독자를 늘려 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늘어날 것 같았으면 구성 사람 모두가 벌써 구독자가 되었을 거요.”

“허허,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내 각별한 후의를 거절하겠다는 말이로군. 그 좁쌀만 한 자존심을 이 후지모토 앞에서는 내세우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이제 우리 무엇이나 주고받을 수 있는 동무가 되지 않았소.”

후지모토가 또 장칼로 책상 옆구리를 툭툭 쳤다.

“좁쌀만큼이라도 자존심이 남아 있으면,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겠소?”

정식은 일어나 신문 뭉치 쌓는 일을 다시 했다.

“동무라고 했나요?”

문득 생각 난 듯 정식은 일손을 멈추고 후지모토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고.”

“그렇다면 동무가 매 맞고 살지 않도록 도와주시오. 그리고 동무를 생각해서 이만 돌아가 주시오.”

후지모토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리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우리 좋은 사이에 건너기 힘든 강이 생기오. 배찬경 군의 경우처럼 말이오.”

후지모토는 정식이 남시로 이사 온 이래 조선인 순사보를 데리고 와서 정식의 집을 여러 차례 수색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행동을 탐문하고 관찰했다. 시에서 그리움의 대상이 민족이 아닐까 의심까지 해보았나 보았다. 하지만 정식을 문제 삼기에는 아직 애매한 눈치였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더 골치 아픈 독립사상가로 변신시킬 가능성을 우려했으리라. 여린 감성을 가진 인간과는 관계를 좋게 유지하면서 그 틈을 파고들겠다는 잔꾀를 쓰리라.

배찬경이 정식 밑에서 총무 일을 하던 때였다. 후지모토는 배찬경에게 월급이 좋은 구성 수리조합(水利組合)에 다니도록 알선하고 암암리에 압력을 가했다. 속셈을 아는 배찬경은 기가 막힌다며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것을 거절한 일로 할아버지한테 모처럼 칭찬을 받았다나.

후지모토는 정식을 잠시 째려보다가 장칼을 덜렁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듣자 하니 일본인 순사들은 고을 수령이나 된 듯 행패가 자심하다고 했다. 후지모토로서는 여간 인내하지 않는 셈이었다.

 

14

 

은은한 라일락 꽃향기가 마당의 대기에 흠뻑 스몄다. 바람이 강아지풀의 질감으로 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울타리 너머 길로 나온 닭들이 라일락나무 밑 탁자 앞에 앉은 두 사람에게 무슨 말이나 하려는 듯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배찬경의 아내가 차를 날라 왔다. 배찬경은 일본에서 배운 커피를 아직도 마시나 보았다.

“근데 웬일로 우리 집에 납시었나?”

그동안 서로 지내온 형편을 나누던 배찬경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면서 정식에게 물었다. 정식도 용건을 꺼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의주에 갈 일이 있다고 했지? 부탁이 있네. 이걸 전해 주게나.”

정식은 두툼한 봉투를 배찬경에게 건넸다.

“뉘한테?”

“뉘긴?”

“뭔데?”

“돈.”

배찬경이 알 수 없다는 듯 정식을 쳐다보았다.

“내가 주었다는 말은 말게. 자네가 주는 것으로 하란 말이네.”

배찬경은 요즘 드문드문 의주를 오르내렸다. 후지모토에게는 의주에서 학교 선생 자리를 알아본다고 둘러댔다고 했다. 대화 중에 무심코, 또는 의도적으로 슬쩍슬쩍 흘린 말들을 조합하면,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단체와 국내와의 연락책을 맡은 듯했다. 작은아버지가 만주 돈화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며 독립군자금을 댄다니까 따지고 보면 적임자인 셈이었다. 이젠 술이나 마시던 긴 휴지기를 끝냈나 보았다.

“적은 액수가 아닌 것 같은데? 자네도 궁하면서……. 못하겠네.”

배찬경이 돈 봉투를 탁자 위 정식 쪽으로 밀어 놓았다.

동아일보사 지국 운영은 바라는 바대로 되지 않았다. 구독자가 더는 늘지 않는 것은 말할 나위 없고 그나마 보급된 신문 대금조차 수금되지 않았다. 정식은 어느덧 많은 돈을 탕진했다. 해야 할 일이 차츰 줄어들고 걱정은 늘어났다. 자연 술에 취해 사는 날이 쌓여 갔다. 수시로 남단동 본가를 찾아가서 손을 벌렸다.

“집안을 일으켜 세우라고 했더니 기둥을 뽑으려 드는구나.”

할아버지는 벌컥벌컥 화를 냈다. 그래도 마지못해 몇 푼씩 마련해 주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금광경영에 실패한 자괴감을 버리지 못했으리라. 기대할 것은 신학문을 배운 장손이라는 미련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으리라. 정식은 지국 사무실 안에 가게를 차려 벽지 장사를 겸했다. 끝없는 추락의 서막이 열린 것 같아 급한 대로 아내의 종용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마침 사동의 손재주가 좋았다. 함께 나무판에 꽃잎이나 넝쿨, 나뭇잎 따위를 조각했다. 조각을 종이에 사방연속무늬 형태로 찍어 벽지를 만들었다. 그런 형편에 오순에게 주는 돈이 정식으로서는 큰돈이 맞았다. 병고와 생활고에 시달리는 오순의 처지가 자신의 처지처럼 오랫동안 마음을 괴롭혀 왔었다.

“누이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다네.”

“허허, 오순이 이젠 지고지순, 순정, 사랑, 선함, 온갖 좋은 것, 소중한 것, 갖고 싶은 것, 아름다운 것, 그리운 것……, 뭐 그런 것들을 다 가진 인물의 대명사로 승화되었군.”

“사실 나도 조금씩 누이를 잊어 왔어. 누이가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던 것처럼 좋은 점만 기억에 남아 있군. 나무에 잎이 다 떨어져 줄기만 남아도 나무를 사랑하던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만 연상되는 것처럼. 자네도 자네 하고 싶은 일을 하듯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줘. 부탁하네.”

정식이 돈 봉투를 배찬경의 주머니에 넣었다. 가로막는 배찬경의 손을 뿌리치면서.

“상실은 삶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네.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은 불륜에 지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대의를 쫓는 일이라네.”

“사랑 속에는 무수히 많은 지고지순한 의미와 행동이 존재하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일생을 바쳐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법 아닐까.”

“이수일과 심순애도 나중엔 재결합을 하던데, 자네 기필코 오순을 둘째 아내로 데려올 생각인가?”

배찬경은 정식이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옛 관습에 따라 첩을 얻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과연 배찬경의 말대로 할 수 있을까? 정식은 눈길을 하늘로 돌렸다. 아내가 새삼스레 머릿속에서 깨어나자, 라일락나무 위에 얹힌 하늘에 돌연 먹구름이 끼는 기분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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