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귀국과 생업

 

 

7

겹쳐진 산들이 수묵화처럼 짙거나 엷게 사방에 펼쳐졌다. 정식은 향기 나는 나무가 많아서 묘향산이라고 한다는 산 이름의 유래를 확인하고 싶었다. 쪽빛 하늘에서 바람이 건들건들 불어 왔지만, 아무리 코를 벌름거려도 향내는 풍기지 않았다. 보현사 암자 이름인 ‘법왕대(法王臺)’라는 글자를 새긴 너럭바위에 앉아 다리쉼을 했다. 이름 모를 작은 풀꽃들이 단풍 사이로 보였다. 새소리가 아늑히 들려왔다. 지나온 영변 약산과 서해도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저 생각일 뿐 약산만 하더라도 여기서 3백 리 길이었다. 그 길을 걸어오는 데 정식은 엿새를 소비했다.

정식은 산 아래를 굽어보다가 수첩과 펜을 꺼냈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큼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산유화(山有花)’ 전문

 

정식은 수첩에 적은 시에 ‘산유화’라고 제목을 붙였다. 큰 소리로 읊었다. 빈산이 웅얼웅얼 메아리로 화답했다. 머릿속이 어느 정도 개는 기분이 들었다.

정처 없이 나선 걸음을 여기서 접기로 했다. 막상 여정을 이어가다 보니 기대하는 바와 부딪히는 현실은 아득한 차이가 있었다. 현실을 존중하자. 집안 기대에 부응하자. 무엇보다도 아내와 두 아이를 처가에 방치할 수는 없지. 마음속에서 떠돌던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정식은 앉아 있던 너럭바위에서 일어났다.

 

8

 

1924년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남시

 

“어이, 김정식 군, 이젠 신문에 시를 쓰는 글쟁이가 되는 건가? 아니면 휴지뭉치를 파는 잡살뱅이 장사꾼이 되는 건가?”

순사주재소 소장 후모토가 허리춤에 찬 장칼을 덜거덕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다가왔다. 정식은 막 ‘동아일보사 구성지국’이라는 나무판자에 붓글씨로 쓴 현판을 출입구에 매달고 난 참이었다. 얼마 전 처가가 있는 평지동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남시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가에 집을 샀다. 집 바로 오른편에는 순사주재소가 있고, 그 곁에는 면사무소가 있었다. 잡화상들과 주막도 멀지 않은 나름 번화가였다. 사동을 한 명 두고 남시와 평지동, 그 인근 촌락에 신문을 보급할 계획이었다.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누가 또 축하해 주러 왔나 해서 밖을 힐긋거렸다. 애초 정식은 별일 아닌 듯 조용히 지국을 개소하려 했다. 구멍가게라도 열 때에는 이웃들을 불러 술잔을 돌리는 풍습을 무시했다. 소문이 나고 지역유지나 친인척들이 나서 줘야 신문 보급에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로 남의 힘을 빈다는 것이 께름칙했다. 그런데 처가를 통해 소문이 났다. 가족을 데려가 기분이 갠 처남이 발품을 판 모양이었다. 인근 인척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술 한 잔이라도 얻어먹으려고 기웃거리던 이웃들도 끼어들었다. 사무실 가운데에 막걸리동이를 들여놓고 둘러앉았다. 정식이 어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장사꾼이 되기로 했소.”

정식이 공손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은 낯빛으로 후지모토에게 대꾸했다. 자기 앞에서는 고개를 굽신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익숙한 후지모토로서는 기분이 언짢은 태도였다. 물론 정식으로서는 나름 감정을 다스린 응대였다.

“우리 주재소에도 신문 한 부 넣어 주오. 그리고 내 청을 잊지 마오.”

“사람들 거웃이 몇 개인지만 모르고 다 안다는 양반한테 내가 도울 게 뭐 있겠소.”

정식이 서산으로 이사 왔다는 사실을 주재소에 알렸을 때 후지모토는 서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자기가 안다고 떠벌였었다. 그러면서도 주민들의 특이한 동향을 보고해 달라고 윽박질렀었다.

“협조해 줘야 내가 다 알게 되는 것이잖소.”

순사주재소에서 서로 했던 말이 다시 오갔다. 후지모토의 낯빛이 심중해졌다. 기분이 좋지 않을 터이지만, 꾹 눌러 참는 듯했다.

그때 사무실 안에서 밖을 힐긋거리던 사람들 중 한 젊은이가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가래침을 내뱉었다. 바로 후지모토의 자전거 앞 바큇살에 떨어졌다. 젊은이는 결단코 의도하지 않은 척 놀란 시늉을 했다.

“아이고, 순사 나으리가 와 계신 줄 몰랐네요. 큰 실례를 범했소이다.”

젊은이가 후지모토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후지모토는 시비를 따지기가 애매하자 눈에 힘을 주고 째려보더니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이내 후지모토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젊은이가 후지모토 쪽을 향해 다시 가래를 내뱉었다.

“개업하는 날 재수 없게 개새끼가 나대다니.”

젊은이는 사무실 안으로 정식을 팔을 끌어당겼다. 엿보고 있던 사람들이 하하하, 통쾌하게 웃었다.

 

9

 

1925년

 

북풍이 매서웠다. 도로로 난 미닫이 출입문 틈을 문풍지로 단단히 메꾸었는데도 바람이 파고들었다. 매캐한 연기를 솔솔 내뿜는 난로는 주위만 미지근하게 덥힐 뿐이었다. 장작 값을 아낀다고 넉넉히 사지 못한데다가 사 놓은 장작더미조차 눈발이 틈을 헤집고 스며들어가 눅눅했다. 정식은 두루마기 깃을 여미고 의자를 난로 곁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신문을 계속해서 읽었다. 신문에는 이광수가 쓴 ‘조선문단의 현재와 장래’(동아일보, 1925. 1. 1.)라는 평론이 실려 있었다.

…… 본래 시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할 만한 조선에서 불과 5, 6년 내 이만한 발달을 한 것을 생각하면 찬탄 아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안서(岸曙 金億), 월탄(月灘 朴鍾和), 회월(懷月 朴英熙), 소월, 석송(石松 金炯元) 제씨의 시는 조선 신춘 시단에 기초를 쌓기에 각기 잊지 못할 공헌을 하였을 뿐더러, 그들은 모두 30 미만의 젊은 시인들이라 장래에 크게 촉망할 것이오. ……

 

정식은 신문을 책상 위에 던져 놓고 일어섰다.

“순결을 잃은 시인에게 시적 영감은 없어.”

“병든 인간이 되면 결국 시혼이 시인을 떠나지.”

나빈과 김억의 충고가 번갈아 떠오르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아무래도 장작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국을 나와 거리로 나섰다. 거리에는 두꺼운 옷을 입고 몸을 웅크린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다. 정식은 시장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10

 

해송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눈부셨다. 하얗게 반짝이는 물비늘이 따스한 봄기운을 전했다. 바닷가 밭에서 젊은 여인이 일을 하고 있었다. 바구니를 옆에 끼고 씨감자를 심었다. 정식은 여인이 오순임을 직감했다. 해송 사이에 몸을 감추고 훔쳐보았다. 여인은 자꾸만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마른기침을 했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을 두드렸다. 감자를 심는 일손이 더디기만 했다.

정식은 신의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철산에 들렸다. 신의주는 아버지 때문에 갔다. 아버지는 더는 보고 있기 어려운 지경으로 변했다. 집안 식구들은 아버지 때문에 정식이 더 탄압을 받을까, 그렇지 않아도 기둥이 흔들리는 집안이 까닥해서 폭삭 망할까 걱정했다. 정식은 둘째 작은아버지 김인도의 독려 편지를 받고 신의주 교회에 온 김익주 목사를 만나 아버지의 병 치료를 상담했다. 그러고 나서 마침 가는 방향이 같은 교회 신도의 목탄화물차를 얻어 타고 철산에서 내렸다. 대학을 중도 포기하고 일본에서 돌아온 배찬경이 오순의 소문을 전해 온 까닭이었다.

“남편의 뭇매에 골병이 든 오순이 결국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대. 어린 아들 키우랴, 농한기에는 생선장사 하랴, 죽지 못해 사는 처지에 이르렀다네.”

배찬경의 말을 듣자, 잠시 떠난 듯하던 오순에 대한 안타까움이 밤바다의 밀물처럼 흥건히 밀려왔다. 오순을 처음 만난 지 14년, 결혼하면서 만나지 못한 지 9년이 흘렀다. 허상이 아니라 실존이었다. 가서 어쩌자는 거냐는 내심의 반발을 무릅썼다.

오순은 듣던 대로 병색이 완연했다. 씨감자가 담긴 소쿠리를 엉기적거리며 옮겼다. 봄바람이 오순과의 추억을 실어 왔다.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오순의 눈길이 정식이 있는 곳에 와 닿기도 했지만, 정식을 알아보지 못했다. 석양이 어둠으로 바뀌고 있는데도 정식은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의 꿈은 무엇일까? 몸부림치다가 스스로 지치고 마는, 그런 것일까? 이젠 정말 오순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때가 왔다. 그것이 무엇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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