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3.1독립운동과 폐교

 

3

 

“우리는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민족은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것임을 선언하노라.”

갈산 장터 가운데의 임시연단 위에서 오산학교 학생 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장터에는 오산학교 학생과 교직원, 용동교회 신자, 면민 등 수백 명이 모였다. 전날 밤 늦게까지 오산학교와 용동교회를 통해서 격문이 돌았다.

3월 1일 경성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는 정주 출신으로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이 민족대표로 참석한데다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었다는 소식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3.1독립선언식을 계기로 탑골공원에서는 대규모 군중이 모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2일에는 오산학교 선생님인 박기준과 심재덕이 학생과 기독교인 80여 명을 모아놓고 곧 갈산에서 일어날 만세운동의 참여를 독려했다. 3월 6일에는 오산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사용할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보관하다 발각돼 일본 헌병에 체포되었다.

군중들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었다. 학생들이 밤을 새워 그린 것들이었다. 개중에는 자발적으로 그려서 들고 나왔다. 지난 며칠 사이 이런 일들이 준비되고 있으리라고 정식은 눈치 채지 못했다. 우리도 독립운동에 힘을 보태야 된다고 동무들을 설득하거나 동무들의 말에 동조하는 정도로 뒤늦게 자각한 의분을 품었을 따름이었다. 하숙에서 배찬경이 자주 보이지 않아서 동무들의 하숙에 놀러 다니는 줄로만 알았다. 너처럼 말로만 독립운동을 해서 되겠느냐고 그런 배찬경을 핀잔했었다. 이제 보니 배찬경이 주동자 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배찬경은 군중들에게 선언문이나 태극기를 나눠주는 대열에 끼어 있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이니까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느라 조선 독립을 지껄이는 줄 알았는데,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점이 놀라웠다.

“대한독립 만세!”

“왜놈들은 물러가라!”

선언식이 끝나자 군중이 중심가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배찬경이 낀 몇몇 오산학교 학생들이 앞에 서서 구호를 외쳤다. 선생님들도 눈에 띄었다. 김억은 정식에게서 가까운 옆쪽에 있었다. 막상 시위가 일어나자 그 격렬한 흐름에 망설이지 않고 동참한 것이 반가웠다. 흥분한 소수 학생들이 일으킨 단순한 시위가 아님을 깨달았을까? 아니, 속으로는 학생들보다 먼저 더 많은 울분을 키우고 있었는지 몰랐다.

군중 속에서 총검을 착용한 일본 헌병들이 달려오고 있다는 전언이 돌았다. 하지만 수적으로 워낙 우세했기 때문에 군중은 개의치 않고 기세 좋게 고읍역까지 행진을 계속했다.

 

4

 

“정식 학생, 정식 학생, 나와 봐요.”

하숙집 아주머니가 정식의 방 앞에 와서 불렀다. 정식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방금 마당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중이었다.

군중 규모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만세운동은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3월 31일 정주읍 시위에서는 무려 스물여덟 명의 사망자를 냈다. 시위를 저지하는 일제 헌병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그런 중에 오산학교 학생들이 날마다 몇몇씩 자취를 감추었다. 자신은 비겁분자가 되기 싫어 열심히 참가했는데, 되레 열성분자들이 시위 현장에서 보이지 않았다. 배찬경도 아무 말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하숙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정식은 그럼 그렇지, 역시 변사 흉내나 내는 나약한 존재라고 비웃었다. 집으로 도망쳤거나 하숙에서 숨죽이고 있으리라. 나중에 돌아와서는 궁색한 변명을 하리라. 하지만 도망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어젯밤 하숙집 아주머니의 겁에 질린 목소리를 통해서였다.

“아무래도 찬경 학생이 잡혀간 것 같네.”

지레짐작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아주머니는 실제 그럴 가능성이 짙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정식의 고향인 곽산이 친정이었다. 거기서 흘러들어온 소문까지 귀를 세우고 있었다. 곽산에서는 엊그제 더 큰 참살사건이 일어났다고 했다. 시위 참가자들이 수천 명에 이르자 일본 헌병들이 참가자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심지어는 미친개를 잡는 데 사용하는 쇠갈고리를 휘둘러 닥치는 대로 죽였다. 갈산에서는 헌병 체포조가 시위 현장에서 보아 둔 얼굴들의 집을 찾아 움직인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배찬경을 걱정하는 한편, 그렇지 않아도 의심스런 정식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기어코 정식에게도 체포의 순간이 온 것일까?

정식이 꾸물대고 있자, 문이 덜컹 열렸다.

“갓놈아, 뭘 해?”

정식은 가슴에 걸려 있던 불길한 기운 하나가 쑥 빠져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일어나 인사를 했다. 짐승 털로 된 목도리를 귀까지 덮어 두른 할아버지가 성큼 마루로 올라왔다. 할아버지가 타고 온 말이 마당 가운데에서 멀뚱히 정식을 바라보았다.

“가자, 집으로.”

할아버지는 거역할 수 없도록 눈에 힘을 잔뜩 준 얼굴로 명령했다. 방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마루 끝에 선 채.

“나라의 독립도 좋고 민족의 자유도 좋다. 허나 장손에게 변고가 생기면 집안 꼴이 어찌 되겠느냐? 집안이 살아야 나라도 사는 법이야.”

“전 못 가요.”

“못 가?”

할아버지는 정식이 말로만 해서는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혼례 때부터 지금까지 정식은 할아버지의 결정에 매번 불만을 품었다. 그런 태도가 이미 만성이 돼서 무조건 거역하리라고 믿는가 보았다. 물론 정식에게는 매번 타당한 사유가 이었다. 할아버지가 문턱 앞에 선 정식의 손을 냅다 낚아챘다.

“못 가요.”

정식은 힘을 다해 버텼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나라의 독립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독립도 중요했다.

“네 구촌 아저씨와 칠촌 아저씨가 시위에 끼어들었다가 그저께 밤에 잡혀갔단 말이다. 죽일 놈들이 뼈를 뚝뚝 분질러 내보낸다더라. 어서 가자구나.”

할아버지도 힘껏 잡아당겼다. 할아버지의 완력은 젊어서부터 명성이 있었다. 호랑이를 실제 때려잡는 괴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지만, 곽산 사람들은 누구나 호랑이도 때려잡을 사람이라고 하면 응당 할아버지를 지칭하는 줄 알았다. 막나가는 광부들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쩔쩔맸다. 그때 곁에서 지켜보던 하숙집 아주머니가 마루로 올라와 정식의 등을 떠밀었다.

“할아버지 말을 들어. 일단 무사하고 볼 일이야.”

결국 정식은 마루를 거쳐 뜰로 끌려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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