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레몽 크노 지음

 
 

[현대경제신문 안효경 기자] 이 책은 반쪽짜리도 안 되는 동일한 일화에서 출발한 99개의 문체 변주에 따른 실험 연작이다.

에피소드는 간단하다. 이야기 속 화자가, 목이 길고 희한한 모자를 쓴 웬 젊은이 하나가 만원버스에서 누가 자꾸 자기 발을 밟는다고 항의하는 걸 봤는데, 두 시간 후 로마광장에서 외투 앞섶 단추를 올려달라며 조언을 건네는 친구와 같이 있는 그자를 다시 마주친다는 내용이다.

크노는 자기가 겪은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캐낸 “간결한 주제 주위로 거의 무한으로 불어나는 변주를 이용한” 이 일화의 기발한 문체 변주곡을 두고 “문학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전혀 내 의도가 아니었고, 어쨌거나 연습을 해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면서, “그것이 어쩌면 고루하고 여러모로 녹슨 문학에서 문학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고 넌지시 말하며 문학의 낡은 권위를 희희낙락하는 놀이판으로 바꾼다.

실로 이 일화는 현재-과거 버전, 희곡, 노래(동요, 창), 시(소네트, 알렉상드랭, 자유시 등), 감각(후각-미각-촉각-시각-청각)적 버전, 철학용어, 동물계 용어, 식물계 용어, 수학-기하학, 영어섞임-일본어투-북한어-사투리 버전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며, 유쾌-상쾌-통쾌한 재미를 안긴다.

만화경 같기도 하고 프랙털 같기도 한 이 작품들은 마술처럼 접혔다 펼쳐지는 문체의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전통적인 문학이론과 글쓰기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문체의 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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