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용 내외정책홍보원 원장
권희용 내외정책홍보원 원장

지금 대한민국에는 하소연할 곳이 없다. 어디든 찾아가 답답한 심사를 터놓고 말이라도 붙여볼만한 곳이 없다는 의미이다. 벌써 몇 날 며칠째 온천지에 ‘국정농단’을 규탄하는 소리만 들린다. 아우성이다.

‘대통령 욕하기 대회’가 열린다 해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게다. 소위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을 둘러싼 온갖 소문의 반에 반만이라도 사실이라면 욕을 먹어도 싸다. 대통령은….

이런 판국에 정말 어디다 대고 경제가 어려워 걱정이라는 하소연을 하겠으며, 민생이 심각하다는 소리가 어느 귀에 먹히겠는가. 며칠 전 서울시청광장에서 있었던 국정농단규탄시위는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 역력했다. 

모여든 시민이 달랐다. 물론 대부분 서울시민이겠지만, 그들의 부류가 다양했다. 나이별로 고교생부터 대학생, 중장년층과 노령층이 골고루 섞여있었다. 눈으로 구별은 안되지만 직업 또한 다양했다. 국정전반에 대한 불만이 빚은 사태라는 점을 말해주는 게 분명했다. 

최순실이라는 여자의 말을 신주단지처럼 떠받들고 국가 주요사안을 결정했다는 ‘알다가도 모를’ 대통령통치관련 ‘유언비어’가 정말이었다면, 나라는 이미 치유하기 어려울 지경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들이 각계각층에 뿌려놓은 잡초가 상당히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깊다는 뜻이다. 대학의 교육정책을 좌우했는가하면, 국민의 삶을 이끄는 문화정책도 그들의 손아귀에 놓여있었다. 권부중심에 그들의 끄나풀이 인사부터 주요정책까지 두루 주무르고 있었다고 하니 그렇다.

그러니 경제가 주저앉고, 민생이 힘겹다고 아무리 외친다한들 허수아비 위정자들의 귀에 들렸겠는가? 월례행사처럼 주술에 걸린 꼭두각시가 민생을 크게 생각하는 듯 국회를 향해 우아하게 한마디씩 한 것이 민생대책의 전부가 아니었겠는가. 그렇게 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 정부 들어 새로운 전문가들이 생겼다. 소통전문가들이 그들이란다. 소통은 불통의 반대다. 온갖 매체가 경쟁적으로 발달한 이 시대에, 그것도 IT라면 세계최고수준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소통보다 불통이 문제라는 게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연유를 헤집고 올라가면 상층부에 최고 위정자가 버티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국민이 없을 지경이 된지 벌써 오래다. 그면서도 지지층에 따라 그것이 악의적이고, 이념 편향적이며, 정략적인 폄하라고 믿어온 사람들도, 그날 시청광장에서 분노의 함성을 아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는 성장을 종식할 즈음까지 이르렀다. 2%대 성장도 힘겨운 쉼을 몰아쉬고 있다. 수출로 지탱해 온 이 나라의 경제명운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여러 달이 되었다. 

경제팀이 약체여서 그렇다는 야권의 지적도 맞는 지적이 아니다. 기업가정신이 해이진 까닭도 아니다. 근로의욕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도전정신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바로 그 정신을 깔아뭉개는 위정자의 원모심려가 없었다. 훼방을 받고 있었다. 총명함이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도 의심이 갈 지경이 되었다. 그렇더라도 그 참모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들도 훼방꾼이라는 게 진정 맞는 소리인가.

그들은 오직 일신상의 이익만 파고들었을 게다. 그러니 민심의 바다에 바람이 일라치면 뱃전에 나아가 치마폭 휘날리며 천지신명한테 무사태평을 빌면 그만이었다. 민심의 바다에 어마어마한 태풍이 불어 닥치리라는 것을 그들 눈에는 보일 리 만무였을 테니까.

정직한 고백과 신속한 수습이 요동치는 민심의 바다를 가라앉히는 첫 번째 방법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잔꾀는 패망의 첩경이다. 한번은 속는다. 어리석어서 속는 게 아니다. 짐짓 눈감아준 것이다. 두 번은 아니다. 시퍼런 칼날을 치켜들고 노려보고 있다. 민심은 민생의 다른 말이면서 동의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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