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귀국과 생업 13 길가 쪽으로 난 미닫이문이 드르륵 열렸다. 누군가 지국 사무실로 들어왔다. 정식은 신문 뭉치들을 사무실 한쪽 구석으로 옮기던 중이었다. 아직 구독자를 찾지 못한 신문 뭉치들이 사무실 한쪽 벽을 절반 높이를 넘겨 채웠다. 정식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지모토 순사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서 있었다.“정식 씨, 당신이 민요시인이오? 민요라, 민요…….”정식은 일을 멈추고 책상 앞에 앉았다. 지난해 《개벽》(1925. 4)에 실렸던 김기진(八峰 金基鎭)의 평론 ‘현시단의 시인’을 기억해
5장 귀국과 생업 11 지국 사무실의 미닫이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아내가 정식의 책상 앞에다 편지 한 통을 툭 내던졌다. 그동안 사무실에는 얼씬하지 않았다. 남자의 일터에 출입하지 않는 여인네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 한몫했겠지만, 해야 할 말조차 참는 아내의 성격으로서는 그보다는 점증하는 남편에 대한 불만 탓일 가능성이 컸다. 오늘은 달랐다. 나름 대담한 결심을 품고 온 듯했다.“이 여자는 또 어찌 낚아챘소?”아내가 정식 앞에 똑바로 서서 정식을 꼬나보았다. 퍽 당돌했다. 당혹감을 견디며 정식이 편지로 눈
5장 귀국과 생업 7겹쳐진 산들이 수묵화처럼 짙거나 엷게 사방에 펼쳐졌다. 정식은 향기 나는 나무가 많아서 묘향산이라고 한다는 산 이름의 유래를 확인하고 싶었다. 쪽빛 하늘에서 바람이 건들건들 불어 왔지만, 아무리 코를 벌름거려도 향내는 풍기지 않았다. 보현사 암자 이름인 ‘법왕대(法王臺)’라는 글자를 새긴 너럭바위에 앉아 다리쉼을 했다. 이름 모를 작은 풀꽃들이 단풍 사이로 보였다. 새소리가 아늑히 들려왔다. 지나온 영변 약산과 서해도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저 생각일 뿐 약산만 하더라도 여기서 3백 리 길이었다.
5장 귀국과 생업 5 구성 평지동. 정식이 이부자리에 몸을 눕히자마자 아내는 성큼 저고리를 벗었다. 밤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체면을 차리지 않았다.“아이들 장난감은 관두더라도 장인 장모 선물은 사왔어야지요.”아내가 등잔불을 껐다. 이불을 들썩이며 정식 곁에 누웠다. 어느새 치마와 속옷을 벗었는지 미끄러운 맨살이 정식의 몸에 닿았다.“됐어요.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에요.”아내가 정식의 샅 사이로 손을 넣었다.“당신을 보니까 오빠의 불편한 심기가 도졌나 봐요. 도대체 혼인을 하기는 한 거냐고 자주 물었거든요.”가족들의 눈총과 구박
5장 귀국과 생업 11923년경성 커엉, 커엉.기적이 울렸다. 정식이 경성역을 빠져나왔다. 반년 만에 돌아왔다. 작별하는 사람과 상봉하는 사람으로 역 광장이 소란했다. 큰 가방을 들고 사람들 틈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정식이 곡절 끝에 시모노세키 역 광장을 빠져나왔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조선인 청년들이 부두에 모여 있다가 의심쩍어 역으로 몰려온 덕분이었다. 멀찍이서 딴 짓만 하던 경찰은 그때에야 비로소 다가와 말리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칼을 휘두르는 일본놈을 폭행한 조선인 청년만 잡아갔다. 정식은 승선한 뒤 피투성이가 된 일본
4장배제고보 시절과 도일 13 바람이 살랑살랑 피부를 간질여 더위를 식혀 주는 회나무 그늘 속. 정식은 도미꼬, 배찬경과 함께 도시락을 가운데 두고 너럭바위 위에 둘러앉았다. 도심의 절 경내면서 많은 묘비들이 가까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즈넉한 숲속 분위기였다. 마침 공휴일이었다. 배찬경이 찾아왔다. 도미꼬의 어머니가 소풍을 권했고, 도시락을 준비했다. 정식이 학원에서 돌아오면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꼴이 안쓰러웠는가 보았다. 정식은 공부도 공부려니와 나가면 쓰게 되는 돈을 벌충할 방법이 없었다. 군대 간 아들 또래라서일까? 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