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귀국과 생업

 

1

1923년

경성

 

커엉, 커엉.

기적이 울렸다. 정식이 경성역을 빠져나왔다. 반년 만에 돌아왔다. 작별하는 사람과 상봉하는 사람으로 역 광장이 소란했다. 큰 가방을 들고 사람들 틈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정식이 곡절 끝에 시모노세키 역 광장을 빠져나왔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조선인 청년들이 부두에 모여 있다가 의심쩍어 역으로 몰려온 덕분이었다. 멀찍이서 딴 짓만 하던 경찰은 그때에야 비로소 다가와 말리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칼을 휘두르는 일본놈을 폭행한 조선인 청년만 잡아갔다. 정식은 승선한 뒤 피투성이가 된 일본 옷을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조선인들이 건네 준 상비약으로 상처를 치료했다.

멀리 보이는 남대문을 향해 정식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상과대학 입학에 실패함으로써 시간과 돈을 축낸 꼴밖에 되지 않았다. 길가에서 이마의 땀을 훔치고 있는 인력거꾼이 보였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눈을 맞추자마자 재빨리 달려왔다.

“어디로 모실깝쇼?”

정식은 다시 일본에 유학을 갈 생각은 접었다. 일본인의 조선인 차별과 무차별 참살을 떠올리면 저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동시에 증오와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거기에 더해 도미꼬가 오순을 빼내고 가슴 한 가운데를 차지할까 두려웠다. 할아버지는 거의 10년 만에 금광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금광은 빚으로 다른 이에게 넘어갔다. 더 이상 유학비를 대줄 형편도 못 되었다. 도쿄에 체류하고 있었다면, 무슨 일을 해서든지 학비를 벌 각오였다.

이젠 직장을 잡아야 했다. 김억을 만나면 해결책이 있을까? 여정 내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았어도 경성에서는 김억밖에는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

“종로여관으로 갑시다.”

종로 3가에 있는 종로여관은 김억이 자주 묵는 여관이었다. 거기선 김억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정식은 인력거에 올라탔다.

2

 

“빈, 야수들 틈에 발가벗고 놓여 있는 기분이었네. 당최 일본에 갈 생각일랑 접게.”

“우리 민족의 보배 같은 시인이 주구(走狗)들 아가리에서 놓여나 천만다행이네. 자네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 두겠네.”

나빈은 일본에 가서 본격적으로 문학 공부하기를 열망해 왔다. 하지만 나빈의 할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가업인 의술로 대를 잇기를 바랐다. 나빈이 경성의전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도망쳤을 때에는 생활비를 대주지 않는 방법으로 기어코 돌아오게 만들었다. 지금도 나빈은 나름 할아버지와 투쟁 상태인 것을 나빈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정식은 며칠 전까지 일본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소상히 이야기해주었다.

“오순 양, 술을 한 병 더 내오오.”

나빈이 정식 옆에 앉아서 술시중을 들던, 오순과 같은 이름의 기생에게 얼굴을 돌렸다. 오순이 심드렁하게 일어나 주모가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모처럼 정식을 보니 나빈을 처음 만난 날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 때의 일이 생각났나 보았다. 이번에는 질투심을 드러내 애를 태워 보려는 수작일까? 나빈과 나누는 말을 듣자니 정식이 나름 이름 있는 시인이라는 점도 한몫 거든 것이리라.

피맛골 쪽에서 두부장수가 흔드는 방울소리가 딸랑딸랑 들렸다. 마침내 귀국했다는 실감이 안도감과 함께 정식의 몸을 적셨다. 불과 반년 남짓 자신이 경성을 비운 사이 나빈이 훌쩍 커 버렸다는 실감도 동시에 정식의 머릿속에 넘실거렸다. 나빈은 지난해 초겨울부터 올봄까지 동아일보에 ‘환희(幻戱)’라는 장편소설을 연재했다. 새파랗게 젊은 작가가 큰 신문에 연재를 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는데, 연재를 마친 지금은 그 덕에 일약 유명인사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나빈이 내색 없이 예전처럼 정식을 맞아주는 것이 그저 고마울 정도였다.

“나는 상과대학에 들어가려고 했었네. 웬만하면 가업을 잇게. 논밭 문서를 틀어쥔 노인들의 고집을 어떻게 꺾겠나? 의사를 하면서도 문학을 할 수 있지 않겠나?”

나빈이 더는 일본 유학에 뜻을 두지 않도록 정식은 못을 탕탕 박았다. 그만큼 일본사람들의 야수 같은 행태에 치를 떨고 있었다. 문학을 겸업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나빈을 달래는 말이기도 했고, 정식 자신의 앞날에 대한 위로이기도 했다.

“그럼 자네는 이제 무슨 공부를 할 텐가?”

“학교 공부는 놓았네. 김억 선생님에게 일자리를 부탁했네. 빈 자네도 수소문해주게.”

“여부가 있겠나. 허나 자네 말처럼 시업(詩業) 겸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 할 텐데.”

오순이 돌아왔다. 쟁반에 담아 온 술과 돼지고기전을 술상에 올려놓았다. 앉았던 자리니까 앉는다는 듯 무릎을 괴고 정식 옆에 도사려 앉았다.

“이봐, 오순 양, 앙탈만 부리지 말고 분위기 좀 내 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온 정식 군에게 팍 안겨 봐라고.”

“흥! 이 양반은 영혼을 오순인가 뭔가 하는 계집한테 통째로 바쳤다니까요.”

오순이 정식과 나빈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오순이 바로 자네 아닌가? 하하하.”

나빈이 다가와 오순을 정식의 품에 밀어 넣었다. 오순이 못 이기는 척 정식의 무릎에 엉덩이를 올리고 정식을 끌어안았다.

 

 

3

 

“신문대금만 착실히 올려 보낸다면 지국 설립을 승인하겠습니다. 시인이 그런 고된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긴 하오만.”

동아일보사 직원이 앞에 앉은 정식과 김억, 나빈을 둘러보며 물었다. 정식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김억과 나빈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더구나 정식의 얼굴에 나타난, 보통사람보다 이악스럽지 못한 심성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을 것임 예감하고 있었으리라.

정식의 집안 형편을 소상히 들은 김억은 정식을 적극적으로 돕고자 애썼다. 시 원고를 신문과 잡지에 소개했고, 정식이 번역한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의 소설 ‘연기’를 출판시켜 보려고도 노력했다. 하지만 문필생활은 누구한테든 돈 벌기가 되지 않았다. 시를 몇 편씩 발표하는 것만으로는 생계유지를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김억은 직장을 찾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나빈도 함께 뛰었다. 마땅한 자리가 나서지 않았다. 서로 애를 태우는 와중에 고향에서 여동생 김인저가 이 달에 출가를 한다는 소식이 정식에게 날아왔다. 직장을 잡지 못한 채 귀향을 해야 할 처지였다. 그때 김억이 고향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장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의향을 물었다. 일시적이나마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권하는 인상이었다. 정식에게는 그나마 물을 본 기러기처럼 고마운 일이었다.. 고향에 지국을 설립하고 지국장을 맡으면 겸해서 집안일도 돌볼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다.

“걱정 놓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식은 각오를 다지며 대답했다. 동아일보사 직원과 똑같은 우려를 품고 있던 김억이 일단 한숨을 돌리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빈은 이마에 깊은 주름을 잡았다. 감성이 예민한 시인이 그런 무디고 야박한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며 반대를 했었다. 순결을 잃은 시인에게 시적 영감은 없다고 술에 취해 떠들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반대해 보려고 신문사에 따라왔다. 정식이 자신의 형편을 강조하는 바람에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식의 태도가 완고하자 나빈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오래 하지는 말게.”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겨우 한 마디 덧붙였다.

동아일보사를 나오자,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하늘에 잔뜩 구름이 끼었다. 주황색 감들이 매달린 마당의 나무가 마구 몸을 뒤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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