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세상은 도를 잃었다.

 
 

#15. 세상은 도를 잃었다.

 

이런 말을 보았습니다. <장자>에서요. ‘세상은 도를 잃었고, 도는 세상을 잃었다.’ 이건 무슨 말인가요.

세상이 순리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건 알겠습니다. 도를 넘은 사람들, 정도를 잊은 사람들, 예를 들면 그런 사람들을 따라 순리를 잃어버린 기후환경의 변화. 세상이 도를 벗어났죠. 그런데, 도가 세상을 잃었다니 이건 무슨 뜻입니까. 도는 본래 불변이라면서요. 어떻게 도가 세상을 잃을 수 있죠?

세상이 도를 따르지 않으니 도가 세상을 잃는 것이지.

아하!

이런 건 어떤가. 의사는 환자를 헤아리지 않고 환자는 의사를 믿지 않는다. 종교인이 신도를 돈으로 보고, 신도들은 지도자를 믿지 않는다. 정치가는 국민을 호구로 보고 국민은 정치가를 믿지 않는다. 소위 사표(師表)가 돼야 할 사람들은 도를 표방하는 사람들일세. 언필칭 ‘지도자’라는 사람들 말이야. 그들은 정도(正道)가 무엇인지 모범이 돼야 하거든.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정도를 벗어나서 사리사욕과 황금만능주의의 리더가 되어버린다네. 따르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이지.
그러면 사람들이 그걸 모르나? 금방 알아채고 그들을 불신하지. 그러니 사람들은 학교를 그저 지식을 사고파는 곳으로 여기고 교회나 절은 축복을 거래하는 상점 정도로 여기는 세상이 돼버린 거야. 정치인이나 재판관들은 또 어떤가. 지금 정도를 지키는 정의와 진리의 수호자는 대체 누구인가. 누가 있는가. 사람들은 역시 이 사실도 잘 알고 있네. 요즘 사람들은 더 이상 중세시대 사람들처럼 어리숙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도를 지키는 사람도 도를 따랴야 할 사람들도 모두 제 자리를 잃어버리고 있는 셈이로군요.

좀 이해가 되는가. 도(道)는 무능/무력해서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세상은 영악해서 도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네.

 

장자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어떤 성인인들, 설령 신인(神人)인들, 도리를 벗어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옛날 공자도 못한 일이다. 인간세계는 절반만 체면을 차리고 절반은 그저 짐승이나 비슷한 채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 아닐까. 인간이 숭고하거나 고상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끝까지 이룰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 世喪道矣 道喪世矣: 세상도의 도상세의

(<장자> 繕性편 - 본성을 수선하다)

- 세상은 도를 잃었고, 도는 세상을 잃었다.

 

#16. 물의 정치, 불의 정치

 

그런데 세상이 도를 잃었다는 것은 비단 요즘 세상만의 일일까. 2천년 넘게 옛날의 장자도 그 무렵에 이미 세상이 도를 잃고 도가 세상을 잃었으니 이런 말을 남긴 게 아니겠는가. 수천년래 역대의 성군이나 성현 등등이 줄곧 세상에 도를 찾아주려고 애쓴 일을 생각해보면, 세상이 도를 잃고 도가 세상을 잃은 것은 인간이 살아오는 동안 줄곧 그랬던 것 아닐까 문득 의심이 든다.

- 도가 온전히 바로 선 세상은 단 한 번도 없었네.

장자가 이렇게 말했다.

- 도가 바로 선 세상을 향하여 가고 있을 뿐이지. 이를테면 지상천국이니 유토피아니 하는 이상향(理想鄕)의 모델을 앞에 그려놓고 그것을 향해 가는 게 고작이라니까. 좀 더 바로 섰다가 좀 더 기울었다가 하면서 꾸준히 가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과연 그렇다면 과연 그런 세상을 이루는 날이 오긴 올까요?

글쎄. 그런 날이 과연 올까? 내가 공자시대 얘길 하나 들려주지.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정(鄭)나라에 자산(子産)이란 성인이 있었네. 나이는 좀 더 많으며 지혜와 덕을 지닌 재상이었지.

당시 재상이란 임기가 따로 없이 왕이 시키면 하고 물러나라 하면 물러나는 때였는데, 자산은 거의 늙어죽을 때까지 재상직에 있었다. 나이가 들고 병들어 물러날 때가 되자 자산은 왕에게 대숙이란 사람을 후임으로 천거했다.

그리고 자산은 대숙에게 정치의 대의를 이렇게 일러주었다.

“본래 백성을 복종시키는 데 관대함으로 해야 한다고 했소. 그러나 실제 정치를 해보면 그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거야. 관대함으로 백성을 따르게 하는 것은 큰 덕이 있는 자라야 가능한 일이거든. 그러니 덕으로 다스려서 통하지 못할 바엔 엄하게 다스리는 게 낫소. 놀랍겠지만 본래 ‘불의 정치’보다는 ‘물의 정치’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대저 불이란 워낙 뜨거운 것이라 사람들이 함부로 대들지 못하오. 그러나 물은 부드러운 것이라서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만만히 여기기 쉽단 말이오. 그래서 불에 다치는 사람보다는 물로 인해 다치고 죽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거요. 백성을 위하여 관대하게 다스리는 것이 오히려 백성에게 더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하지만 대숙은 인격자였다. 정말로 재상이 되자 차마 사나운 정치를 할 수가 없어 관대한 정치를 시작했다. 그러자 도적떼가 점점 늘어났다. 으슥한 곳에 똬리를 틀고 어슬렁거리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해치는 자들이 늘어났다. 여기저기 도둑놈들이 진치고 앉아 강도질을 일삼으니 세상이 흉흉해졌다.

대숙이 후회하며 “내가 자산의 말을 듣지 않아 생긴 결과다”하고는, 군대를 보내 대대적으로 도적을 소탕했다. 모두 잡아 처형해버리자 도둑이 줄어들었다.

 

장자가 말했다.

나는 나라를 왕이 있는지 없는지 표도 안날 정도로 다스려야 한다(無爲之治)고 말한 바 있지만, 요즘 세상에 그렇게 하다가는 나라가 배겨나질 못할 걸세. 인간의 변덕스런 심성을 어떻게 믿겠나. 인간을 믿을 수 있는 세상. 유토피아가 있다면 아마도 이게 먼저 이루어진 세상이라야 할 걸. 대숙이 행한 ‘불의 정치’에 대해 공자도 말했지.
“잘한 일이다. 정치가 관대하면 백성들이 태만해지고, 백성이 태만해지면 이들을 사납게 다스려야 하며, 사납게 다스려 백성들이 고통을 받으면 정치는 다시 관대해져야 한다. 관대함으로 사나움을 구제하고, 사나움으로 관대함을 구제하여(寬以濟猛 猛以濟寬) 정치는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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