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제 장공과 안평중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善與人交 久而敬之 선여인교 구이경지
사람 사귀기를 잘하며 오래 사귀어도 공경을 잃지 않는다 (<論語> 공야장편) 
공자가 제나라의 명재상 안평중의 인간관계에 대해 칭송하며

 

제나라에서 경공(傾公)이 죽고 영공이 즉위할 때부터 장공 경공(景公)이 다스릴 때까지 재상으로 중용된 사람은 안평중(晏平仲)이다. 이름은 영(嬰)이다. 학식이 높았으며 스스로 근검절약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였고, 군주가 묻는 말에 막힘이 없으면서도 곧고 바른 말로 응답하였으므로 백성의 존경을 받고 다른 나라 제후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공자(孔子)는 안평중을 일러 말했다. “안평중은 사람을 잘 사귄다. 오래 알고 지내도 공경을 잃지 않는다(善與人交 久而敬之).”(논어 공야장 편)

처음 섬긴 영공(靈公)은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그 때 진(晉)나라는 도공(棹公)이 죽고 아들 평공이 즉위한 해에 제나라로 쳐들어왔다. 첫 전투에서 제나라 군대가 밀리자 여공은 달아났다. 안영이 만류했으나 영공은 임치성으로 달아났고, 진나라 군대가 포위하자 나와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진나라는 외성 안의 모든 집과 벌판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영공은 후계를 정하는 데에도 우유부단했다. 첫 부인이 아들 광을 낳자 태자로 세운 뒤에 중희와 융희를 후처로 얻었다. 중희가 아들을 낳았는데 융희가 그 아들을 태자로 다시 세우라고 청하자 영공이 이를 허락하였다. 오히려 친어미인 중희가 반대했는데도 영공은 “내가 정하면 그만이야”하면서 태자 광을 변방으로 보내버리고 서자를 태자로 삼았다. 영공이 중병이 들자 대부 최저(崔杼)가 본래 태자 광을 불러들여 제후로 옹립하니 그가 장공(莊公)이다. 장공은 융희를 처형하고 영공이 죽은 뒤에는 중희의 아들도 살해하였다.

장공 3년에 진(晉)나라로부터 대부 난영이 죄를 짓고 도망쳐왔다. 난영은 예전에 도공을 세웠던 공신 난서의 손자다. 제 장공은 안영과 전문자(田文子)의 반대를 물리치고, 임치성의 굴욕을 보복하려고 난영을 받아들였다. 이듬해 난영을 진나라의 곡옥으로 몰래 들여보내 제나라 군이 공격할 때 호응하게 한 뒤 장공은 군사를 이끌고 진의 수도 강성을 기습 공격했다. 아무런 대비가 없던 진나라군은 크게 당황한데다 곡옥으로부터 난영의 반란군이 협공해오자 혼란에 빠졌다. 진 평공은 성급히 자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부들이 평공을 진정시키고 난영을 향해 반격하니 난영은 곡옥으로 돌아갔다가 진나라군에게 잡혀 죽었다. 공격에 실패한 제 장공은 철군하면서 국경의 작은 성 하나를 차지하여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장공은 방자했다. 당공이라는 대부에게 미모의 처가 있었는데, 당공이 일찍 죽자 대부 최저가 그녀를 맞아들였다. 최저는 태자의 지위를 잃을 뻔했던 장공을 불러들여 제후로 옹립한 장본인이다. 장공에게는 개인적으로도 은인이 아닌가. 그런데도 장공은 아리따운 첩을 부러워하여 일부러 최저의 집에 놀러가 그녀와 사통했다. 심지어는 그녀를 희롱하면서 최저의 갓을 들고나가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했다. 오죽하면 그의 시종이 안 된다고 말릴 정도였으나 장공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시종 가거를 채찍질하였으므로, 최저와 가거가 다 같이 장공에게 원한을 가졌다.

어느 날 내빈을 위한 연회가 열렸을 때 최저는 병을 핑계대고 나가지 않았다. 이튿날 장공은 최저를 문병한다는 구실로 찾아가 그를 잠시 살펴본 뒤 최저의 처를 찾았다. 여자가 내실로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그자 장공은 방문 앞에서 기둥을 붙들고 노래를 불렀다. 시종 가거가 장공의 수행원들을 속여 대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안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때맞춰 최저의 부하들이 무기를 들고 장공에게 몰려들었다. 장공은 황급히 난간 위로 올라가 화해를 청했으나 그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종묘에서 자살하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또한 거부하면서 말했다. “최저의 신하인 저희들은 음란한 자를 처리할 뿐, 다른 명령은 모릅니다.”

장공이 도망쳐 담을 넘으려 할 때 날아온 화살이 허벅지에 꽂혔다. 장공이 떨어져 내리자 그들은 달려들어 그를 죽였다. 


이야기 PLUS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영이 안에서 벌어진 일을 눈치 채고 소리쳐 말했다. 

“임금이 사직을 위해 죽으면 신하도 그를 따라 죽고, 임금이 사직을 위해 도망치면 신하도 따라서 도망친다. 만약 임금이 사적인 일로 죽거나 도망치는 것이라면 그의 총신이 아닌 담에야 누가 같이 책임을 지겠는가.” 문이 열리자 안영은 안으로 들어가 장공의 시신에 머리를 얹고 곡한 뒤 예법에 따라 절하고 나가버렸다. 장공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틀이 지나 최저는 장공의 이복동생 저구를 제후로 옹립했다. 경공(景公)이다. 곧 최저와 경봉이 좌상과 우상이 되었는데, 그들은 변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도성 사람들에게 두 사람을 돕겠다는 맹세를 하게 했다. 안영은 맹세를 거부했으나 그들은 죽이지 못했다. 안영은 민심이 의지하는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제나라의 태사(太史)가 ‘최저가 장공을 시해하였다’고 기록하자 최저가 그를 죽였다. 그 동생이 태사가 되어 똑같이 쓰자 최저가 또 그를 죽였다. 막내 동생이 다시 똑같이 썼다. 최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놓아두었다. 변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사람의 칼에는 시퍼렇게 피가 흐른다. 아무도 그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지만, 제나라의 태사는 목숨을 내놓고 사관의 임무를 묵묵히 다했다. 세 형제가 칼 앞에서도 기록의 원칙을 굽히지 않은 일은, 지난날 진나라의 태사 동호가 진 영공의 죽음에 대한 조돈의 책임을 기록한 일과 함께 지금까지도 사관(史官)의 모범으로 전해오고 있다. 


태사(太史)가 ‘최저가 장공을 시해하였다’고 기록하자 최저가 그를 죽였다. 그 동생이 다시 똑같이 쓰자 최저가 또 그를 죽였다. 막내 동생이 다시 똑같이 쓰자 최저도 어쩔 수 없이 놓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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