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3.1독립운동과 폐교

 

1

 

“김정식 군, 앞으로 나오게.”

정식이 교탁 앞으로 나갔다. 김억이 노트 하나를 정식에게 건넸다. 정식이 며칠 전 김억에게 가져다준 시작 노트였다. 요즘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토로한 시들이었다. 부조리한 주위 사람들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고, 가슴 메어지는 심사의 일단이기도 했다. 노트를 들고 김억이 교실에 들어올 때부터 정식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드디어 비평의 형식을 빌려서나마 김억의 의견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금부터 김정식 군의 시를 음미하는 시간을 갖겠네. 김정식 군, 그 노트에서 접힌 부분의 시를 직접 낭송해보게.”

정식은 속마음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용기를 냈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접동

 

진두강(津頭江)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 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

이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참아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 ‘접동새’ 전문

 

학생들이 와,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정식은 동무들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창밖에서는 위태롭게 휘어진 전나무 가지에서 쌓인 눈이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자리로 돌아가도 좋네.”

김억이 다시 교탁 앞에 섰다.

“박천 땅 진두강가에 살았다는 형제자매에 대해 전해오는 슬픈 민담을 시로 읊은 거라네. 큰누나가 출가를 앞두고 의붓어미의 시새움을 견디다 못해 죽었댔다지? 그 원혼이 접동새가 되었댔다지? 남은 동생들을 못 잊어 밤이면 이 산 저 산 옮겨 다니며 구슬피 운댔다지? 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 장가를 가서 그럴까?”

정식은 장가를 들먹이는 김억의 말이 자신의 비굴한 처신을 모욕하는 것으로 들렸다. 당해도 싸다는 감정과 가야 할 길이 가로막힌 억울함이 교차했다. 시는 설화를 빌리기는 했지만, 사실은 오순을 그리며 쓴 것이었다. 가슴에 맺혔을 한 때문에 오순의 얼이 안주하지 못하고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우는 것만 같았다.

“시 속에 향토적 자연과 정서, 농촌의 소박한 인정 풍속까지 자연스럽게 담겼군. 곧 경성에 보내서 문예지에 발표되도록 해야겠네.”

학생들이 다시 박수를 쳤다. 김억은 얼마 전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번역해 소개했다. ‘봄’, ‘봄은 간다’ 등의 시도 발표했다.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김억은 오순을 잊지 못하는 정식의 심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설령 그 점에 대해 관심을 가졌더라도 입 밖에 내서 둘이 교감하는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리라.

정식은 혼례를 치른 뒤 달포 동안 구성 평지동 처가에서 지내다 학교로 돌아왔다. 신부는 풍습대로 1년 정도 친정에 그대로 머물기로 했다. 그 뒤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오면 정식은 첫째 작은아버지 부부가 쓰는 방에 신접살림을 차리기로 했다. 첫째 작은아버지네는 그 사이 남산학교 앞에다 새 집을 지어 분가하기로 했다.

자포자기 심정이 된 정식은 신부를 건성으로 대했다. 다만 신부가 제 이름을 쓸 줄 몰라 이름을 쓰도록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또 홍순단(洪順丹)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홍상일(洪尙一)로 고쳐 주기도 했다.

아내를 거느리고 살 바엔 평온한 생활이 되도록 애를 써야 하리라. 그러다 보면 오순이 마음 밖으로 사라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두워지면 더 명료해지는 별들처럼 오순이 가슴속에 또렷이 살아나 있었다.

 

2

 

정식이 김억과 함께 정주 읍내로 들어가는 신작로를 따라 걸었다. 김억이 할 말이 있다면서 오늘 같이 하교하자고 했다. 정식은 4학년이 되면서 학교 방침에 따라 기숙사를 나와 읍내 하숙에 들었다. 김억 집과 가까운 거리였다. 설날이 지나 날씨가 따뜻했다.

“자네들이 분개하는 마음을 잘 알아. 그러나 자네, 정식 군은 달라야 하네. 자네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키는 시인이 돼야 해. 정신을 지키는 일은 나라를 구하는 일의 한 부분이지. 식민지 백성이라고 정신까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지배를 당해서야 쓰겠나. 더구나 자네가 내 뒤를 이어 우리나라 신시를 개척해 나아갈 시인이 되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소질과 능력에 맞는 방법으로 저항해야 효과적이지. 저항한다고 해서 무조건 대들면 불을 찾아 날아들다가 타죽고 마는 부나비와 무엇이 다르겠나. 자네에게는 시를 쓰는 일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저항하는 더없이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어. 또한 자네만은 이념과 관습, 계몽의지를 앞세운 안목이 좁은 시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네. 그런 시인은 당대에는 어느 한편의 박수를 받을지 모르지만, 백 년 후에까지 독자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지 않아. 백 년 천 년, 나라가 독립된 후까지도 민족의 정신이 깃든 시로 살아남도록 힘써 주게.”

“우리 아버지를 저 꼴로 만든 놈들이 누구야요?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요? 차라리 시인이 안 될지언정 그렇게는 못하겠어요.”

“어허! 감정적인 복수는 잠시 자기 위안은 될망정 항구적인 승리와는 거리가 있네.”

오산학교는 민족교육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일본어가 국어로 인정받는 시기인데도 학생들은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배웠다. 학생 대부분이 일본어를 잘 할 줄 몰랐다. 민족의식이 어느 학교보다 드높았다. 그런 배경 아래 독립운동을 고무시키는 소식들이 학교에 전해졌다.

연전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했다. 일제의 고의적인 은폐로 그 사실이 즉시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본 유학생들과 재미, 재중 동포의 활동을 통해 차차 국내에 알려지면서 독립운동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특히 일본 도쿄에서는 2.8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오산학교 교사를 지낸 이광수가 가담하여 선언서를 직접 썼다.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 독살설까지 나돌았다.

정식의 할아버지도 어디선가 그런 소식들을 들었다.

“넌 이제 어른이야. 아이까지 태어났어. 가장으로서, 장손으로서의 책임을 한시도 잊으면 안 되느니라.”

할아버지는 정식이 독립운동에 관여할까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정식은 보름 전 첫딸을 보았다. 지난해 늦가을 아내가 아이를 낳으러 친정으로 갔었다. 딸을 낳아서 섭섭했던지 할아버지는 이름을 간단히 구생(龜生)이라고 지었다. 구성(龜城)에서 낳았다는 뜻이었다. 김억에게는 정식이 독립운동에 끼지 못하도록 단속해 줄 것을 인편을 통해 당부했다. 정식은 그 말을 김억의 부인인 육촌누이를 통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김억은 학생들 사이에서 은밀히 번져가는 수상쩍은 움직임을 눈치 채고 정식을 걱정하던 중이었다.

정식은 문학적 스승을 자임하는데다 인척인 김억이 다른 선생님들보다 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용기를 내서 김억과 논쟁을 한다고 한들 마땅한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할아버지 부탁을 받았다고 했으니 진정을 토로한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저 부탁이 자신의 뜻으로 포장되어 강요될 뿐이리라. 나이든 이들은 신념과 정의를 그럴듯한 이유를 대서 내팽개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대중의 질서 속으로 재빨리 스며드는 변신에 능했다. 그런 퇴행을 경험이 준 지혜라고 내세웠다. 정식은 나중에는 어서 이야기를 끝내자는 뜻으로 김억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김억은 정식의 태도가 자신의 당부를 수긍하는 증거라고 믿지 않았겠지만, 자신의 논리적 한계를 적당히 덮을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는지 슬그머니 말을 접었다.

근처 절에서 범종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벌써 해가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자네 아버님처럼 허망하게, 일방적으로 일본 놈들에게 당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부디 명심하게.”

서로 헤어져야 하는 갈림길에 다다라 김억은 마지못한 듯 정식에게 한 번 더 당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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