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거미줄과 잠자리

 

 

7

 

북풍이 창문을 칠 때마다 문풍지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기숙사의 창가에 선 정식은 그 많던 별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깜깜한 밤하늘을 응시했다.

“돈이냐 사랑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던 배찬경이 항간에 유행하는 신파조 변사의 목소리로 지껄였다. 가까운 데서 부엉이와 멧비둘기가 우는 소리가 부웅부웅, 꾸욱꾸욱, 바람 소리 속에 섞여서 번갈아 들려왔다.

“시끄러! 진지하게 방법을 짜내 보란 말이야. 네가 못 푸는 문제는 조선독립밖에 없잖아.”

정식이 신경질을 냈다.

“네 머릿속이 시끄럽겠지. 심순애는 부를 택했어. 세상사람 모두가 고민 없이 응당하게 선택하는 방법이니까. 너도 할아버지 분부에 따르는 게 현명해, 홍 씨네는 평지동에서 제일 큰 지주야. 조선시대에는 괜찮은 벼슬아치도 나온 양반 집안이라고. 그런 집안 딸이니까 어른들 말도, 남편 말도 고분고분 잘 듣겠지, 인물도 반반하겠지. 강변 오두막집 소작농에다가 계모 밑에서 자란 순이보다야 골백번 낫지 않겠어?”

“찬경이, 누구나 다 말하는 그딴 뻔한 말 말고, 가슴 며지는 날 생각해서 신묘한 방법을 짜내 보라, 제발!”

정식이 애원했다.

“신묘한 방법? 신묘장군대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배찬경이 소원을 성취해준다는 ‘신묘장군대다리니경(經)’을 염송했다. 민간에 널리 펴져 있는 산스트리트어로 된 불경이었다. 첫 구절을 염송하고는 멋쩍게 웃으며 중단했다.

“햐! 길이 없는 데로 나를 몰아대는구나. 네 할아버지가 금광에 매달린 지가 몇 년째야? 금광에 손댔다가 숱한 재산 날리고 나자빠진 사람이 곽산 앞바다 모래알만큼이나 많아. 네 할아버지는 우직하게 밀고 나가서 기어코 대성공을 코앞에 두었어. 그 고집을 누가 꺾겠나?”

“그렇다고 얼핏 할아버지 눈에 띤 처자를, 나는 한 번 얼굴도 못 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

“햐! 정말 너는 먼 외계에서 우리 마을로 유람 온 사람 같구나. 누구나 다 그랬는데 영 생소한 풍습을 대하듯 하는구나.”

정식은 배찬경이라고 해서 묘책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알았다. 다만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어떤 수가 있을까 기대했다. 정식은 깜깜한 하늘에서 하염없는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나름으로 외국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신문물뿐 아니라 신사조에도 민감했다. 막 경성 쪽에서 소문으로 들려오는 새로운 방식의 혼인에 대해서도 들었으리라. 그런 할아버지가 왜 생각을 아낄까? 부자며 양반이라는 이웃들의 선망을 견고히 유지하는 것, 그것이 기필코 지켜야 할 가치라는 판단에 왜 금이 가지 않을까? 금광 경영도 그 가치를 더욱 굳건히 유지시켜 줄 수단에 지나지 않을까? 그런 입장에서 당신이 가문을 지키는 든든한 대들보라고 자부하고 있을까?

“외계에서 온 유랑자처럼 사랑에 웃고 우는 한 사내가 있었느니, 바로, 바로…….”

배찬경이 다시 신파조 변사의 흉내를 냈다. 손가락으로 정식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가자, 정식이 냅다 배찬경의 손을 쳤다.

“그러면 날래 순이를 꿰차고 만주로 튀라.”

정식이 주먹으로 벽을 쾅 쳤다.

“흐흐흐. 아프지? 떨어져 있으면 그립지만, 함께 있으면 지겨운 법. 그런 이치를 아는가? 오산학교가 자랑하는 수재가 길바닥에 떨어진 밥풀만도 못한 일에 맘을 써서 되겠나. 나도 좋아하던 순덕이 놔두고 할아버지가 정해준 에미나이와 결혼했어.”

“너는 순덕이를 희롱만 했지. 그러면 안 되지.”

“제가 하면 달콤한 연애라고 하고 남이 하면 요사한 희롱이라고 말하는 법. 정식아, 정신 차려라. 연애는 혼인 생활의 예행연습에 지나지 않아. 학업에나 열중해. 하늘을 꿰뚫고 땅을 들추어 온가지 진리를 캐고 말련다…….”

배찬경이 교가의 한 소절을 불렀다.

“임마, 하늘을 꿰뚫는 기세로 조선독립이나 시켜 봐!”

정식이 다시 벽을 쳤다. 그리고는 아픈 손을 감싸 쥐고 벽에 고개를 묻었다.

 

8

 

사랑방 아랫목 서안 앞에 앉은 할아버지가 쌈지에서 담배를 꺼내 곰방대 대통에 재웠다. 건너편에 앉은 정식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철이 없다고 여길까? 기가 막혀 상종할 수 없다고 여길까? 눈을 지그시 감고 곰방대만 뻐끔뻐끔 빨았다. 정식은 할아버지를 뵙고 자신의 심정을 소상히 밝히리라 다짐하고 집으로 달려왔다. 아차, 네 마음을 몰랐구나, 라면서 할아버지가 물러나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저 이제 갓놈이 아니야요.”

할아버지는 정식을 갓놈이라고 불렀다.

어린애로 취급한다기보다는 할아버지의 각별한 애정 어린 결정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었던가 보았다. 하지만 정식은 비로소 자신이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입는 대신 자기 결정권을 저당 잡힌 신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정하도록 허락해 주시라요.”

할아버지가 금속제 재떨이에 곰방대 대통을 텅텅 쳤다.

“갓놈아, 나가 보아라.”

할아버지는 일부러 갓놈이라는 호칭을 계속 썼다. 정식이 일어나지 않자 더 큰 소리가 나도록 재떨이에 대통을 쳤다.

“새도 가지를 가려서 내려앉아. 족보도 없는 미천한 여자를 우리 집안에 들여놓으면 세상사람들이 박장대소하지 않을까? 어서 학교로 돌아가거라.”

아무리 설명하고 설득해도 할아버지의 단순한 반대논리는 옹성처럼 견고했다. 안 되겠던지 할아버지가 먼저 일어나 문을 열고 휑 밖으로 나갔다. 한바탕 싸움을 치르고 싶은데, 할아버지는 결국 샅바를 잡혀 주지 않았다. 정식은 뭔가 자신이 모르는 잘못된 대응으로 가능한 일이 불가능한 일로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열린 문으로 마당을 서성이는 정식의 아버지가 보였다. 저고리 없이 적삼만 걸치고, 바지는 엉덩이가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내려왔다.

“정식이가 장가가서 어른이 되면 아버지, 널 똥개를 발로 차듯 늑씬 차 주라 할 거야. 히히히.”

아버지가 본채 뜰로 올라서는 할아버지의 뒤에 대고 히쭉거렸다. 할아버지는 만성이 되었는지 돌아보지도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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