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거미줄과 잠자리

 

3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졌다. 새 계절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 못마땅한 듯 교정의 나무들 속에서 매미들이 그악스레 울었다.

“아까 읍내 행사에 참석해서 제군들이 잘 알겠지만, 오늘이 이른바 천장절(天長節)이외다. 일본 천황이란 자의 생일이란 말이외다.”

연단에 오른 교장 조만식이 교정에 도열한 학생들에게 훈화를 했다. 연단 밑에는 찹쌀떡이 든 나무상자가 너덧 개 쌓여 있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이 바로 그제이외다. 우리나라가 죽은 거나 다름없고 우리나라 백성이 모두 상중(喪中)인 거나 다름없소이다. 어찌 슬프고 분하지 않겠소이까. 이런 처지에 원수 일본 놈들 명절에 일본 놈이 주는 떡을 받아먹어야 하겠소이까? 마음의 가책을 안 느끼겠소이까?”

다른 학교와 달리 오산학교에는 일본인 교사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조금 전 아침나절에 오산학교가 위치한 갈산면 내 학생들이 모두 면 소재지에 있는 학교에 모여 천황의 만수무강을 비는 천장절 행사를 치렀다. 순사주재소의 일본인 소장이 집합명령장을 보냈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고 일본 방식대로 의식을 진행했다. 정식이 남산학교에 다닐 때에도 천장절이 되면 읍내에 있는 학교에 모여서 같은 방식으로 행사를 치렀다. 떡은 천황의 하사품이랍시고 천장절 행사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었다.

“제군들, 군들이 머지않아 나라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야겠소이다. 우리 동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형제처럼 우의를 두텁게 하면, 자연히 일본 놈들의 간악한 손아귀에서 풀려날 날이 올 것이외다. 기대를 키우고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 이 떡을 내다버리면 어떻겠소이까?”

학생들은 의분에 사로잡혀 박수를 쳤다. 주먹 쥔 팔을 치켜들며 ‘옳습니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조만식 교장이 연단에서 내려올 때에는 더러 울음까지 터뜨리기도 했다. 정식도 치를 떨었다. 주먹에 힘을 넣고 이를 악 물어 그것을 막고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무슨 역모의 현장에 들어선 것처럼 가슴이 제멋대로 일렁였다.

 

4

 

하늘이 마냥 푸르렀다. 청량한 날씨가 계속되자 태풍과 폭우 걱정 대신 농민들은 가뭄에 애가 탔다. 자전거 브레이크를 잡는 삐익 소리를 듣고 정식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학교 소유 배추밭에 물을 주던 참이었다. 저학년인 1, 2학년 학생들 대부분이 기숙사에 거주하므로 필요한 곡식과 채소는 스스로 가꾸었다. 읍내로 들어가는 도로 가에 자전거가 멈춰 서 있었다.

“어이, 김정식 군 아닌가.”

자전거에서 내리는 중년사내는 읍내에서 자전거 판매상을 운영하는 최형호였다. 일본에서 자전거를 들여다가 팔아서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전답을 담보로 잡고 여러 차례 돈을 꾸어 주었다. 그런 까닭에 정식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할아버지는 꾼 돈으로 부족한 금광 채굴 자금을 메꾸었다. 언젠가 최형호는 이자는 물을 주지 않아도 낮밤 가리지 않고 무럭무럭 자란다는 말을 할아버지 앞에서 했다가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정식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한 열흘 전인가 싶네. 조악동 금광에 갔다가 자네 할아버지를 만났다네.”

정식이 최형호가 멈춰선 도로 가까운 밭둑으로 나갔다.

“할아버지가 자네 장가보낼 때가 지나간다고 걱정하시더군. 나더러 중매를 서래. 정신이 나간 자네 아버지를 봐서라도 종손인 자네가 얼른 장가를 가서 집안 대들보 노릇을 해야 해.”

드디어 때가 왔구나. 졸업이나 하면 장가가라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환히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중매라는 말보다 장가라는 말이 더 살갑게 김정식의 머릿속에 박혔다. 중매는 신붓감을 정하는 과정. 정식에게는 필요치 않은 일이었다. 늦지 않게 장가보내려는 할아버지의 고마운 마음이 읽혔다.

“중매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최형호는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내 두루 알아볼 테니 마음 놓게.”

최형호가 이내 뒤뚱뒤뚱 수수밭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정식이 겸연쩍어 속에 없는 말을 하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다시 물 주던 자리로 돌아오자 배찬경을 비롯한 동무들이 돌연 정식의 얼굴이 밝아졌다면서 좋은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정식은 중요한 이야기를 섣불리 발설하여 어른들이 하는 말처럼 마귀가 끼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김억이 수업시간에 정식의 노트에 적힌 시를 낭독한 일로 인해 멋대로 부풀려진 정식의 연애담이 꾸준히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중이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일은 주변 마을 주민들 소유의 배추와 무 밭에 물을 주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다. 냇가에서 물을 퍼 나르는 힘든 조로 바뀌게 되었다. 벼 이삭이 여무는 시기여서 논물 대기도 벅차 냇가가 말랐다. 오늘 작업이 끝나면 먼 하류 쪽으로 가서 새 물웅덩이를 찾기로 했다. 그럼에도 정식의 머릿속은 소식을 어서 오순에게 전하고 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만이 차 있었다. 편지에 무슨 말을 쓸까 궁리하다가 물바가지를 떨어뜨렸다.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던 동무가 머리에 난데없는 물을 뒤집어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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