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시선으로 본 경제 이야기

유휘량 작가
유휘량 작가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과 예술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사실 둘 다 예술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예술 자체를 좋아하는 것과 예술 작품에 관심을 갖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소유의 목적보단 그것을 향유하는데 목적이 있는 반면, 예술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컬렉션’, 즉 작품을 수집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다.

필자도 시집을 사서 모으는 취미가 있다. 시집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집을 사서, 저자의 ‘사인(Sign)’을 받게 되면 그 의미가 사뭇 남다르다. 직접 그 저자의 사인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희귀 가치를 가지게 됨과 동시에 ‘교환가치’로서는 그 가치가 낮아진다.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사인을 받을 때 받는 이의 이름을 쓰게 되므로, 실상 교환가치를 가지기는 힘들다. (물론 교환할 생각도 없다.)

그런데 예술 작품에 있어서 이 교환가치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면 각 예술 장르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큰 규모의 시장성을 가지고 있는 미술 작품을 예시로 교환가치와 미적 가치에 대한 차이를 말해보고자 한다.

먼저 미적 가치에 대해 알아보자. 미적 가치라는 것은 사실 한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 반영된 평가를 의미한다. 특히 권위가 있는 비평가, 전문지식인일 경우에 그 미적 평가는 곧 일정 부분 객관적 평가로 전환된다. “00비평가가, 00의 작품을 좋게 평가했다더라~”하는 대중적 인식이 생기게 되면 사람들은 해당 작품이 상당한 미적 장치와 사유들이 숨겨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그것이 곧 스스로가 예술을 향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미적 가치, 미적 평가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엘리트주의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미술관에서 해당 작품을 본 관람객이 그 작품에 대해 좋게 평가했다고 해서 공식적인 미적 가치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일정 제도에 속한 사람들 ‘작품에 대해 그러한 미적 평가를 내려도 되는 승인을 받은 사람’이 그 작품의 미적 가치를 결정하고는 한다. 그런데 대체로 이런 제도권의 사람들은 고학력자이거나, 등단과 같은 제도를 어렵게 통과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말이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일정 제도를 거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위의 기능은 그 권위를 얻게 됨으로서 그 사람이 한 말에 대한 의심을 거세해버리는 기능이 있다. 장점일수도, 단점일 수도 있는 이 기능은 교육자라면, 일정 제도를 통과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그의 권위를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생략’의 긍정적 측면이 있다. 반대로 교육의 측면이 아니라 어떤 동등한 장으로서의 권위는 부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적 평가와 별개로 작품의 경제적 가치는 사람들의 행위 속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엄청난 금액의 작품을 보았는데, 점 하나만 그려져 있다거나 하는, 그런 작품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엘리트’들의 미적 가치 평가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평가보다는 이 미술 작품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얻고자 하는 작품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행위가 가치를 더 높게 측정하도록 한다.

처음에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미학 평론가가 지면을 통해 작품을 평가하고, (필자는 이것이 주식 찌라시와 같다 본다. 평론가의 글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이 말이다) 그 평가를 기반으로 미술 경매자들이 교환가치를 생성하기 위해 전시나 작가의 위상을 높인다. 이후 해당 작품에 대한 경매가 이뤄지고 그때 ‘입찰 경쟁’이 시작되면서 거품처럼 가치가 높아진다.

결국 이때부터 미적 가치의 평가와 별개로 미술 작품이 자본적 투자 가치를 갖게 되면서 엄청난 가격을 형성하게 된다. 그 작품이 실제로 미술사에, 혹은 세계사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면 오히려 교환가치는 없다. 보존 가치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미적 가치의 평가는 주관적이고, 그 주관성을 토대로 가격 경쟁을 통해 작품이 비싸지는 것은 예술 행위가 아니라 ‘경제 행위’다. 따라서 작품 자체에는 아무런 ‘교환가치’가 없다. 그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본적 의미를 두는 ‘경제적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많은 평론가들의 작품 평가는 경제적 가치 상승을 위한 ‘인용’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경매가가 높다고 해서, 그 작품이 훌륭한 미적 가치를 갖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유휘량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 석사 졸업, 현대문학 현대소설 전공 박사수료

지금까지 시를 꾸준히 써왔고,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부마항쟁기념재단, 숲과나눔재단,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책임자로 연구과제를 수행하였으며, 통일인문학단, 통일부, 국방부, 국가인권위원회, 한국정신문화재단 등에서 논문으로 여러 차례 수상을 하였다. KCI에 논문을 다수 게재하였으며, 공저로 <몸의 미래 미래의 몸>이 있다. 현재 한겨레교육에서 문학, 정신분석, 철학 등 문예창작에 필요한 이론들을 강의하고 있으며 2022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에 시부문 <스케치 - 기린의 생태계>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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