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시선으로 본 경제 이야기

유휘량 작가
유휘량 작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을 알고 싶어 한다. 그 욕망을 알아야 자신을 지킬 수 있기 때문도 있지만, 나도 그 사람에게 뭔가를 ‘원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욕망을 알고 싶은 마음은 어느 시대나 공통된 이야기이다. 특히 소설과 같은 서사물은 서로의 ‘욕망’을 잘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런데 경제활동은 생각보다 ‘서로의 욕망’을 너무나 잘 알고 시작한다. 일종의 경제적 공리로, 판매자와 소비자의 위치가 정해진 채 ‘거래’, ‘교환’을 한다는 것은 양측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서로의 욕망이 불순물 없이 완전무결한 이 상태 속에서 우리는 ‘구입과 판매’, ‘노동과 수입’ 등의 경제적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내가 신발을 사러 신발 가게에 들어가면 명확히 신발가게 주인은 들어온 ‘내’가 신발을 사러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신발 가게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 사람에게 돈을 주고 (마음에 든다면) 신발을 사려고 한다는 전제가 개입된다. 하지만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기 전까지는 그 전제는 ‘진실’로서 성립되지 않는다. 가게에 들어왔지만 단지 마실 겸 둘러보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화장실이 급해 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가게에 간다는 것은 ‘교환’ 행위를 하러 간다는 전제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이것을 ‘이데올로기적 공리’라 부른다. 우리가 법적으로 그렇게 규정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일종의 약속을 하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공리’이다. 따라서 필자가 예시로 든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공리’가 개입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교환’이 전제된 특정 장소, 시장이라던가, 마트라는 타자의 공간에 들어가도 불편하지 않고 그곳에 있는 것을 당연한 권리라 생각하며, 그 공간의 주인, 혹은 나의 공간에 들어온 타자에 대해서도 딱히 불편해 하지 않는다.

당연한 사실을 나열했지만 이 당연한 사실이 우리를 새삼 놀랍게 한다. 우리는 이런 경제활동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생활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믿고 행동한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발생은 지식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 행위 속에 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생각 없이 ‘행위’하고 있다.

이것이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거나, 필자가 자본주의의 단점을 지적하기 위해 깔아놓은 밑바탕의 근거인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경제 활동에 있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한 번쯤은 의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의심해야 하는가, 그런 귀찮은 것을 왜 해야만 하는가?

이유는 하나다. 너무 당연한 것을 의심함으로서, 새로운 전복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케팅에 있어 ‘전제’를 뒤집는 ‘전복적인 사고’는 경제적으로 매우 큰 효과를 불러온다. 이런 전복적 사고가 ‘나이키’와 ‘애플’에 있다. 너무나 유명한 말이지만 “‘나이키’나 ‘애플’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판다.”는 말을 다들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사실이 ‘경제적 공리’, 다시 말해 나이키 의류 상품, 애플의 전자기기를 사는 것이 소비자의 욕망이 아니라, ‘기업의 이미지를 선망하는 것, 기업 제품을 통해 좋은 이미지를 얻는 것’을 주는 것이 기존 자본주의 시장론의 전제(제품을 사고 파는 전제)를 뒤집는 전복적 사고의 능력이다.

한편으론 최근에 심리학이나 정신분석과 같은 ‘욕망을 읽기’ 위한 학문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위로와 공감을 주제로 한 심리 관련 저서들은 나도 모르는 ‘나의 욕망을 읽기’ 위한 목적이 있고 비즈니스 심리학·경제심리학은 ‘타자의 욕망을 읽기’ 위한 목적이 있다. 어쨌든, 신기하게도 욕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실상 나와 서로의 욕망을 모른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우습게도 우리의 욕망은 당연한 것을 욕망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욕망은 환유다’라고 정의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완전한 욕망의 고정점(누빔점)을 찾을 수 없다. 저것을 가지면 다른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 욕망은 ‘운동성’, 혹은 ‘지류의 지형도’이지, 어떤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제는 끊임없이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행위하고 발생된다. 

유휘량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 석사 졸업, 현대문학 현대소설 전공 박사수료

지금까지 시를 꾸준히 써왔고,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부마항쟁기념재단, 숲과나눔재단,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책임자로 연구과제를 수행하였으며, 통일인문학단, 통일부, 국방부, 국가인권위원회, 한국정신문화재단 등에서 논문으로 여러 차례 수상을 하였다. KCI에 논문을 다수 게재하였으며, 공저로 <몸의 미래 미래의 몸>이 있다. 현재 한겨레교육에서 문학, 정신분석, 철학 등 문예창작에 필요한 이론들을 강의하고 있으며 2022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에 시부문 <스케치 - 기린의 생태계>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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