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비유로 말하는 이유

 
 

#35. 비유로 말하는 이유

 

장자님은 우언(寓言)을 즐기셨죠? ‘내 글에서 열에 아홉은 우언이다’하셨는데.

그랬지. 그래. 내가 뭐라 했더라?

내 글에는 열에 아홉이 우언이고, 열에 일곱은 중언(重言)이며, 일상적으로 쓰는 치언(巵言)으로 대세에 맞춘다.

아, 좀 쉽게 말해보게. 우언이 뭐고 중언은 무엇인가. 또 치언은 무엇이고.

장자님이 못 알아듣는 건 아니시겠죠?

읽는 사람들 생각해서 묻는 거네. 그렇게 문자를 써서 알아듣지 못하게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말은 단지 ‘나 잘났소’하는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았습니다. 어르신. 제가 해석으로 다시 말해보죠.
첫째, ‘우언(寓言)’은 비유로 하는 말이다. 우화. 자기 얘기로만 말해서는 설득력에 한계가 있으니,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물작용을 끌어와 비유법으로 도를 논한다. 이런 말이 열에 아홉이나 되었다는 거네요. <장자>는 그러니까 90퍼센트가 비유법을 쓰고 있다.

헐. 90퍼센트나 된다고?

열에 아홉이라고 말하셨잖아요. 오죽하면 서점에도 <장자> 해설집보다 <장자 우화집>이 월등 많답니다.

오, 그래?

‘우화집’이다 보니 주로 어린이용 도서로 편집되어 있어요. ㅎㅎㅎ

천하의 장자를 동화작가로 만들었구만.

그러게나 말입니다. 성인들은 거의 안 읽어요. ㅋㅋㅋ

어려서부터 <장자>를 읽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만… 좀 자존심이 상하는군.

에이. 어차피 성인들은 책 안 읽어요. 어린이 청소년 도서로 만들어진 덕분에 그나마 조금씩이라도 팔리는 거 다행인 줄 아세요.

알았네. 정신승리!

둘째, ‘중언(重言)’은 옛 사람(=고로 故老)들의 말을 인용해서 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주장으로 시끄러울 때, ‘옛날에 이런 말이 있소!’ 하면서 내세우는 말이겠죠? 공자님 말씀이야,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야, 성경에 나오는 말이야 등등으로 옛 사람의 권위에 기탁해서 하는 말.

그렇지. 그러나 옛사람이라도 말 같지 않은 말은 인용할 가치가 없지.

선인(先人=옛사람, 선배)이면서도 사람으로서의 도를 말하지 않는다면 진부한 사람이라고 하셨죠.

그래. 선배라고 다 선배가 아니고, 고인이라고 다 훌륭한 말만 남긴 건 아니니까. 옛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쓰더라도 진부한 말을 자꾸 가져다 쓰면, 그 사람 또한 진부한 사람이 될 거네. 자네도 말끝마다 ‘장자가 그랬는데...’ 하면서 옛날 얘기 자꾸 꺼내는 건 조심하라구.

셋째는 ‘치언(巵言)’. 사실은 이걸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어요. ‘치언’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더라구요. 중국어에도 없고.

중국어에 없다고? 맙소사. 내가 중국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죄송. 뭐 고전어휘사전에는 나올지도 모르죠. 제가 말하는 중국어사전이란 인터넷 검색에서 바로 나오는 정도의 사전에 국한된 얘기니까요.

그래서? 결국 찾긴 찾았나?

구글링을 해서 힘들게 찾아냈네요.

오, 천하의 구글. 요즘 장삿속에 손을 안대는 게 없더라만. 옛날의 구글이 아니야.

치언의 ‘치(巵)’가 술잔을 뜻하는 거잖아요? 종지 같이 작은 잔. 조금씩 딸아서 마시는 것이 잔술이니, 이 말은 자잘한 말,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하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그렇기도 하지. 다른 뜻도 있겠나?

잔에 술이 많이 담겼을 때는 조심조심 들어 마시고, 술이 줄어들면 쉽게 기울여 마실 수가 있죠. 그러니 치언이란, 상황에 맞춰 기울기를 달리하는 술잔처럼 상황에 맞춰 하는 말. 즉 임기응변의 말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네요.

옳거니! 그것도 그럴 듯해.

정리하자면 장자님 말씀은, 90%가 비유의 말이고, 70%는 권위 있는 옛말을 인용한 것이고, 그 외에 그때그때 상황에 걸맞은 술잔 같은 말로 이치에 맞춰나간다. 이런 말이 되겠습니다. 이해하는 데 한참 걸렸어요. ㅎㅎ

그래. 그만하면 됐다. 그런데 내가 우언을 많이 말했다고 얘기했는데,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했나?

제가 취미로 이솝 우화를 자주 읽어봅니다만, 같은 이유 아니겠습니까? 직설은 상대를 너무 아프게 하고, 입을 다물자니 답답하고, 그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거죠.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들을 테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일단 재미있게 들으니 거슬려하지는 않을 테고요. 설사 그 말이 자신을 겨냥한 충고라 하더라도 당장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지는 않을 테니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요. 우화는 일단 웃음을 일으키니 듣는 사람도 분노할 겨를이 없죠.
우리 현대인들도 장자님처럼 우언 중언을 많이 쓸 필요가 있을까요?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지금 시대는 직설을 좋아하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라고 했는데, 쓴소리를 달게 받는 사람은 지금도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직설은 자신을 위태롭게도 하지.

<삼국지>에 나오는 예형(禰衡)이란 청년이 그랬습니다. 대단한 지식과 재능을 지녔지만 오만방자하게 함부로 말하다가 조조에게 죽었지요. 독설가.

조조가 아니라 황조에게 죽었지 않나?

조조가 직접 죽이기 싫어 성질 급한 장수에게 보냈으니 죽인 거나 다름없죠. 조조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남을 죽이는 영악한 사람이에요.

맞는 말이네. 그러나 요즘 같으면 아무리 독설가, 궤변가, 거짓말쟁이라 해도 목숨을 빼앗아갈 제왕은 없지 않은가.

하하. 대중의 독재라는 게 있지요. 요즘 악플 무서운 것 모르세요? 말 한 마디 잘못하면 몰매를 당한답니다.

여론의 몰매를 말하는 게야?

딱히 여론이라기보다는… 뭔가 요즘은 인터넷에 떼로 몰려다니면서 조직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생사람 잡는 것도 순식간이더라고요. 그냥 순수한 여론이라면 단시간에 그렇게 수백명씩 물려들어 누구를 죽이고 살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어요?

오, 그런가? 여론을 빙자한 유령들이 있는 게로군. 사실 나도 요즘은 말을 조심한다네. 우언 중언의 기술은 여전히 필요한 셈이지.

하하하. 다음 주에는 제가 써본 우화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제 입으로 재미있다 말하긴 좀 그렇지만, 장자님의 ‘우언’에 자극되어 한 자 써보았어요.

좋아. 기대하겠네. (계속)

 

** 寓言十九 重言十七 (우언십구 중언십칠)

巵言日出 和以天倪 (치언일출 화이천예)

내 말에서 열에 아홉은 비유법이고, 열에 일곱은 인용이며,

매일 쓰는 임기응변의 말로써 도리에 맞게 조화시킨다.

(<장자> 寓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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