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시작의 책

 
 

#21, 시작의 책  
 
‘빨강머리 홍당무’라는 제목의 동화가 있다. 공부 잘하는 형의 그늘에 치여 부모형제로부터 늘 구박받고 궂은 일만 도맡아 하는 천덕꾸러기 소년의 이야기다. 주근깨에 꼬부랑머리, 그리 사랑스러운 외모도 아닌 주근깨투성이 소년인데, 본래 못 생겨서 사랑을 못 받은 것인지 사랑을 못 받아 못 생겨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작가 쥘 르나르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활동한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동화작가 등등이다(Jules Renard, 1864~1910).
그가 죽은 지 꼬박 110년이 지나갔다. 홍당무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도 짧은 우화들을 남겼는데, 하나 소개할까 한다. 

나무꾼 그루비는 평생을 혼자 산 사람이었다.  
그에게 어느 날 책이 한 권 생겼다. 그루비는 글자를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글을 아는 친구를 찾아가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친구가 첫 장을 읽어주었을 때 그루비는 그 내용에 반했다. 하지만 책 전체를 읽어달라고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루비는 글자를 배우고 책을 마저 읽었다. 책이 아주 재미있었으므로 그루비는 다음날 시장에 나갔을 때 나무를 팔아 번 돈으로 새로운 책을 사가지고 왔다. 책에는 놀랍고 재미있는 내용들이 들어 있어서 마치 숲을 떠나지 않고도 세계를 여행하는 듯했다. 그루비는 나무를 팔러 나갈 때마다 책을 한권 두권 사 모으기 시작했다. 읽은 책은 다락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어느 날 보니 다락에 쥐가 드나들며 그가 그토록 아끼는 책들을 갉아먹고 있는 게 아닌가. 
그루비는 쥐들을 쫓기 위하여 고양이를 한 마리 사서 키우기로 하였다. 고양이를 키우자니 우유가 필요했다. 마침 책에서 우유가 사람에게도 매우 유익한 음식이라는 내용을 읽었다. 그루비는 값비싼 우유를 매일 끊이지 않고 얻기 위하여 시장에 나가는 길에 암소 한 마리를 사왔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암소를 돌보고 젖을 짤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는 더욱 열심히 나무를 베서 하인에게 봉급을 주었고, 자신을 대신하여 하인과 암소와 고양이와 책을 돌볼 수 있는 집사를 고용했다. 숲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는 나무를 하기 위해 점점 더 멀리 나가야만 했다. 나무를 베는 일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나무를 베서 시장에 내다 팔면서 친구들이 와도 잔가지 하나 거저 주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돈을 긁어모았지만, 남는 돈은 예전보다 적었다. 
어느 날 그루비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일에 힘겨워하며 과거를 돌아보았다. 홀로 지낼 때에는 아무 걱정 없이 잘 살았는데, 지금은 왜 더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더 외롭고 더 힘이 들까. 그러다가 깨달았다. 이 모든 고난은 책 한 권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 ㅎㅎㅎ
- 웃음이 묘하군요. ‘하하하’하고 웃을 것이지 장자답지 않아요.
- 아니다. 이건 웃자니 슬프고 울자니 웃긴 얘기여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을 때의 김빠진 웃음이니라. 
- 하하하. 요즘 말로 웃프다고 하죠. 
- 웃프다? 흠, 그럴 듯한 표현이네. 
- 문제는 ‘예전으로 돌이킬 수 있는가’라는 점이죠. 책의 맛을 알아버렸는데 다시는 읽지 않을 수가 있을지. 
- 예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걸. 나무꾼이라는 직업이 이제는 금지된 직업 아닐까? 
- 지금도 벌목은 해요. 절차가 좀 복잡해졌을 뿐이죠. 나무를 하나 베기 위해서는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해요. 그루비는 그냥 동네 산에서 다 자란 나무를 마음대로 베어 팔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죠. 법이 생겨서. 
- 자기 산의 나무도 마음대로 베지 못한단 말인가? 
- 에, 엄격히 말하자면 자기 소유 산이나 자기 집 마당에 있는 나무라도 허가 없이 베면 안 된답니다. 허가를 받아야 해요.  
- 아, 그렇구나. 우선 자기 소유의 산이 있거나, 나무에 대한 대가를 먼저 치르고 산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겠지. 그 다음에는 또 관청에 가서 벌목허가를 받아야 한단 말이지? 
- 그래요. 이제는 임자 없는 땅이나 산이라곤 한 뼘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 살기가 복잡해졌군 그래. 우리 시절에는 법이 간섭하지 않는 부분이 참 많았어. 야생이라는 게 존재했지. 임자도 지번도 없는 땅, 국적 없는 인간…. 한 국가의 경계는 그리 넓지 않아서 나라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나라의 경계 밖으로 나가 살 수도 있었지. 말썽을 일으키는 인간을 나라 밖으로 쫓아낼 수도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나라 밖’이라는 영역은 찾아볼 수 없더군. 저 大洋(대양)의 ‘公海(공해)상’과 남극대륙 밖에는…. 
- 현대의 인간들은 사는 게 참 피곤해요.
- 그렇게라도 나무꾼으로 돌아가야겠네. 그루비는. 
- 그래도 옛날의 그루비가 될 수는 없죠. 옛날의 그루비는 글자를 모르고 단지 톱질과 시장에서 나무 값으로 받는 동전을 셀 줄만 알면 되었지만, 지금은 벌목에 관한 법률을 이해하기 위해 글자를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벌목허가서를 쓰려면 쓸 줄도 알아야 하죠. 사 모은 책들은 내다 팔면 되겠지만, 암소와 고양이와 소를 치는 하인과 이것들을 관리하는 집사를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더 어려울 거에요. 
- 아, 그만 돌아가라고 하면 되지 않나? 
- 아이쿠. 공부 좀 하세요. 요즘 세상을 너무 모르는군요. 하인과 집사를 그냥 해고했다가는 부당노동행위로 고소를 당하게 될 걸요. 퇴직수당을 주느라고 남은 재산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 이런. 피곤에서 벗어날 수가 없겠군. 애당초 일을 벌이지 말았어야 하는데.
- 현대인들의 피로증후군은, 다 이런 식으로 얽혀있답니다. 누구도 달리는 열차에서 마음대로 뛰어내릴 수 없어요. 저마다 책임이 있기 때문에. 
- 올라타기는 쉬웠지만….
- 그렇답니다. 
- 문명의 역설이로다. 더 행복해지고자 글자를 읽고 소를 사고 집사를 고용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만 하다니. 들에 사는 꿩은 낱알 하나를 얻기 위해 열 걸음을 걸어가야만 하고 물 한 모금 마시기 위해 백 걸음을 걷네. 농부의 집에서 사육되는 꿩은 때가 되면 농부가 부어주는 곡식을 먹을 수 있고, 우리 안에 마실 물은 끊이질 않지. 그렇지만 누가 더 행복한가. 꿩은 우리 안에서 사육되는 것을 원하지 않네. (澤雉十步一啄 百步一食 不蘄畜乎樊中).
- 자유가 더 중요하죠. 
- 글쎄 그럴까. 그대가 꿩이 아닌데. 

   
* 名也者 相軋也 知者也 爭之器也
 (명야자 상알야 지자야 쟁지기야)
- 명예는 서로를 반목시키고, 지식은 경쟁 도구가 된다.  
- 공자가 衛(위)나라에 초청받아 가는 안회에게 정치의 요목을 조언하며 “명예와 지식은 사람을 해치는 흉기”라면서 한 말.  (<장자> 인간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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