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제 공자 소백(小白)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知子莫若父 知臣莫若君 지자막약부 지신막약군
자식은 그 아비가 가장 잘 알고, 신하는 그의 군주가 가장 잘 안다.(<管子>大匡篇)
포숙이 소백을 보필하라는 군주의 명령을 받고 관중과 쟁론하며 인용한 속담

제 환공은 300여년 춘추시대에 있어 중요한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의 등장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패륜임금 양공 이야기로 잠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여동생 문강과의 사련(邪戀) 때문에 노 환공을 죽인 뒤 제 양공은 나라 안팎으로부터 민심을 잃고 끝내 시해됐다.

양공은 어린 태자시절부터 이미 옹졸하고 이기적이며 음탕했다. 아버지 희공은 친동생이 일찍 죽자 고아가 된 조카 공손무지(公孫無知)를 태자와 차별 없이 아껴 길렀다. 이를 질투하던 태자는 아버지가 죽어 군주가 되자마자 그동안 사촌 무지가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보물과 옷과 재산들을 모두 빼앗아버렸다. 성품이 본래 이러한데다 노 환공을 죽여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 뒤에는 더욱 황음무도해졌다. 대신들을 속이고 잘 죽이기 시작하자 이복동생들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일찌감치 외국으로 달아났다. 그 가운데 규(糾)와 소백(小白)이 있었다. 먼저 규는 외가인 노(魯)나라로 갔고, 소백은 거(莒)나라로 갔다.

규와 소백은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데다 아버지 희공의 둘째와 셋째아들로 계승권의 서열도 높았으므로 그들의 망명길에는 뜻있는 신하들이 동행했다. 둘째 왕자인 규를 위해서는 관중(管仲)과 소홀이 따라갔고, 소백을 위해서는 포숙(鮑叔)이 따라갔다.

두 공자들은 차기 왕권을 염두에 두었다. 신변안전을 위해 모국을 탈출하는 입장은 같았지만, 만약 돌아오게 된다면 그 때는 피치 못할 경쟁자가 될 것이었다. 소백의 외가는 위(衛)나라였는데, 그가 거나라로 간 것은 제나라와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한편 국내에도 때를 기다리는 공자가 있었다. 바로 공손무지다. 일찍이 양공이 노 환공을 죽일 때 서제 팽생에게 일을 맡겼는데, 일이 시끄러워지자 문책한다는 구실로 팽생을 처형했다. 그 뒤에 양공도 가책을 가졌던지 사냥터에서 팽생의 유령을 보고는 낙상하여 다리를 다쳤다. 공손무지는 양공에게 원한을 가진 다른 무리와 함께 때를 엿보고 있던 터라, 그 소식을 듣자마자 습격하여 양공을 죽이고는 스스로 군주가 됐다. 그러나 무지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예전에 무지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놀러 나간 사이에 술로 유인하여 죽인 것이다. 워낙 무지가 민심을 얻기도 전의 일이어서 이 사건은 역모(逆謀)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보다 시급한 문제는 공석이 된 군주 자리에 누구를 앉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대신들이 모여 공자 규와 소백을 두고 적임자를 논의하기도 전에 두 공자와 연결된 정탐꾼들은 이미 노나라와 거나라에 연통을 보냈다.

군주의 자리를 향한 경주는 시작됐다. 출발은 지리적으로 노나라에 가 있는 규가 불리했다. 승패는 어느 공자가 먼저 도성에 도착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공자 규가 노나라로부터 호위 병력을 얻어 출발하기 전에 관중이 발빠른 30승의 기병대를 이끌고 먼저 출발했다. 규가 도착하기 전에 경쟁자인 소백이 먼저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길목에 도달한 기병대는 이미 도성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소백의 수레를 따라잡았다. 마침 소백은 수레 한복판에 꼿꼿이 앉아있었다. 관중이 이를 겨냥하여 활을 쏘자 화살은 소백의 복부에 명중했다. 일순 소백의 부대가 소란해지더니 수레의 휘장이 내려지고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더 확인할 겨를도 없이 수레는 전속력으로 도성을 향해 달려갔다.
경쟁자가 처리되었다면 굳이 뒤쫓을 이유도 없었다. “소백이 쓰러졌으니 이제 경기는 끝났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여유 있게 오셔도 되겠습니다.” 관중은 뒤따라오는 규 공자에게 전령을 보내고 기병대에게 휴식 명령을 내렸다.

이야기 PLUS
제 환공은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다. 춘추시대를 대표하는 다섯 사람의 제후를 꼽아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한다. 제위연대 순서로 보면 제 환공(齊桓公), 진 목공(秦穆公), 송 양공(宋襄公), 진 문공(晉文公), 초 장왕(楚莊王) 등이다. BC770년부터 300여년간 100개가 넘는 제후국들 가운데 가장 강성한 제후들로, 주(周) 왕실을 대신해 천하를 움직였다.

처음 소백이 망명하기 전 포숙을 불렀으나 포숙은 따라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런 포숙을 설득해 따라나서게 한 사람은 관중이었다. <관자(管子)>에 뒷이야기가 전해온다. 관중이 소홀(召忽)과 함께 포숙을 찾아가 말했다. “양공은 포학하니 오래 가지 못할 것이며 그 뒤는 소백이나 규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잇게 될 것일세. 누가 될지는 모를 일이야. 그러니 후일을 위하여 자네 포숙은 소백과 함께 가게나. 나는 규 공자를 따라 가겠네. 나중에 누가 군주가 되든 우리가 다시 모여 큰 뜻을 이루도록 하세.”

그제야 포숙이 소백을 모시러 갔다.

공석이 된 군주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규와 소백 가운데 과연 누구였을까. 아직 왕위를 향한 경주는 끝난 게 아니었다.

“양공은 포학해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며, 그 뒤는 소백이나 규 공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잇게 될 것일세. 후일을 위해 자네 포숙은 소백과 함께 가게나. 나는 규 공자를 따라 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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