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燕婉之求 得此戚施 연완지구 득차척시
아리따운 낭군을 구하려 왔다가 꼬부랑 노인을 얻었구나. <詩經> 邶風)
태자의 신부감으로 위나라에 왔다가 시아버지 선공의 첩이 된 선강을 풍자한 시

위 선공은 주우가 반란을 일으켜 형 환공을 죽일 때 달아났다가 신하들이 반란자 주우를 몰아낸 덕분에 돌아와 군주가 되었으나 그리 덕을 보이진 못한 것 같다. 선공은 망명 중에도 아내를 얻었으나 돌아와서는 이강을 더 사랑했다. 이강은 죽은 아버지 장공이 남긴 젊은 첩이었다고 한다.

맏아들 급(伋)은 이강이 낳은 아들이었다. 선공은 급을 태자로 삼았다. 급이 성장하자 제나라에 중매를 넣어 신부감을 데려오게 되었다. 장차 며느리감이었지만, 제나라에 다녀온 초빙사의 보고를 받고는 선공의 마음이 바뀌었다. 그때 제나라 군주는 희공이며 그 딸의 이름은 선강(宣姜)이었는데, 그녀가 절세의 미녀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공은 그녀가 입국할 국경근처 강변에 화려한 누대를 지었다. 그리고는 구실을 만들어 태자 급을 송(宋)나라에 사절로 보낸 뒤, 누대에서 선강을 손수 맞아 자기 첩으로 만들었다.

선강이 누군가. 제나라 영공의 친누이다. 영공은 누이동생 문강(文姜)과 사통하여 제부(弟夫)인 노나라 환공을 죽이게 되는 천하의 패륜아가 아닌가. 제 희공의 자식농사가 말이 아니었다. 후대의 시인들이 논했다. “제희공에게 선강과 문강 두 딸이 있었는데, 선강은 시아비에게 간음당하고 문강은 오라비와 간통했으니, 인륜과 천리가 이로써 절멸했도다.”

<시경> 패풍(邶風)에 이르기를 ‘아리따운 낭군을 구하려 왔다가 고부랑 노인네를 얻었구나(燕婉之求 得此戚施)’라고 했다. 후대의 시인들이 선공의 일을 비웃어 남긴 노랫말이다. 척시(戚施)란 곱사등이를 일컫는 말인데, 선공이 그런 장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필시 늙어 추하게 꼬부라진 모습을 비꼬아 말한 것이리라.

일은 그것으로 정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군주의 가문이다 보니 권좌를 놓고 후계구도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젊은 선강이 연달아 아들을 낳으니 곧 수(壽)와 삭(朔)이었다. 수는 태자 급과 친형제처럼 잘 지냈지만 삭은 욕심이 많고 교활했다.

태자의 생모 이강이 죽고 젊은 선강이 정부인이 되자 삭과 선강은 권좌를 탐냈다. 있는 말 없는 말로 선공에게 태자의 흉을 보며 비방하더니 마침내 계교를 꾸며 태자를 살해하기로 한 것이다. 아버지 선공의 심사는 어땠을까. 일찍이 태자의 신부감을 가로챈 미안함과 자책감은 선강 모자의 모함을 들으면서 묘한 적개심으로 발전되었다. 선강 모자의 계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선공은 태자 급을 불러 제나라에 다녀오라는 명을 내렸다. 급이 들고 가기로 한 건 그렇고 그런 안부편지 정도나 되었을 것이다. 가는 동안에는 하얀 무소꼬리로 장식한 깃발을 들고 가게 했다. 그것이 사신의 표식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미리 사주를 받은 왈패들이 태자를 쉽게 알아보도록 하기 위한 표식이었다.

선강의 큰아들 수가 모의를 눈치 채고 급에게 달려갔다. 사신으로 떠나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급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지 않고 생존을 구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야.”라면서 곧 길을 떠났다. 태자의 출발을 하릴없이 바라보던 수는 곧 행장을 갖춰 그 뒤를 좇았다.

위나라와 제나라 사이 국경에는 강이 흐르고 있다. 다다음날쯤 이른 아침 국경 선착장에 하얀 무소꼬리로 장식한 깃발을 든 위나라 사신이 나타났다. 기다리던 강도들이 달려 나와 칼을 휘둘렀다. 선공의 아들은 그 자리에서 목이 떨어졌다. “이제 머리를 가지고 군주에게로 가자.”하고 강도들이 일어서는데 그곳으로 황급히 달려오는 무리가 있었다. 강도들과 마주치자 관복을 입은 그 무리의 우두머리는 대뜸 “그의 목을 베었는가?”라고 물었다. 자객들의 임무를 알고 있는 자임이 분명했다. 강도들이 함을 열어 머리를 보여주자 사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없이 울부짖었다. “너희가 엉뚱한 사람을 죽였구나. 너희들이 죽어야 할 사람은 이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급자니라. 내 목을 베어라.”

먼저 죽은 사람은 수였다. 태자 일행이 밤이 되어 야영을 하고 있을 때 따라온 수가 형 대신 죽으려고 태자의 표식을 훔쳐 먼저 길을 국경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야기 PLUS
군주가 아들의 신부감을 가로챈 이야기는 처음이 아니다. 노나라 혜공 또한 아들의 신부를 가로채서 나라가 시끄러웠다. 이 무렵 중국 천하는 제위 승계의 어지러움과 함께 제후들의 성(性)도덕마저도 해이할대로 해이했던 모양이다. 천하의 주인(周 천자)이 유명무실해지니 힘 있는 제후들이 오만방자해진 탓이었을까.

사실을 전해들은 선공은 두 아들이 한꺼번에 죽은 데 충격을 받았다. 그 탓인지 쓰러져 앓다가 보름만에 죽었다고 한다. 태자도 죽고 정부인의 두 아들 가운데 첫째도 죽었으므로 후계는 자연히 삭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바로 혜공이다. 애당초 삭이 꾸민 대로였다. 그때 삭의 나이는 겨우 15세였다. 흉계는 반드시 무르익은 머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때부터 위나라는 30년 사이에 왕이 다섯 번 바뀔 만큼 혼란해졌다.

3년 뒤 대부들이 원한을 품고 난을 일으키니 혜공은 외가인 제나라로 달아나고 급의 아우인 검모가 군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8년 뒤 혜공은 제나라 군주 양공의 지원을 받아 검모를 정벌하고 군주 자리를 되찾았다. 순리를 바로잡으려던 대부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패역한 군주가 패역한 군주를 돕는다. 시대가 그러했으니 곳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반역과 패륜이 횡행하였다. 중국에 공자(孔子)가 등장하기 직전이었다.
 

후대의 시인들이 논했다.
“제 희공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선강은 시아비에게 간음당하고 문강은 오라비와 간통했으니, 인륜과 천리가 이로써 끊어졌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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