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용 내외정책홍보원 원장
권희용 내외정책홍보원 원장

백만 명의 군중이 반정부시위(반 박근혜대통령)를 벌이던 날이다. 시위 군중에 밀려(정확하게 말하자면 더 이상 들어볼만한 연설이나 구호 또는 읽을 만한 피켓에 쓰인 문구가 없어서) 을지로 3, 4가쯤 어느 허름한 주점에 모여 앉았다.

그래봐야 모두 넷이다. 70을 갓 넘긴 낡은 시인과 한때 민완기자로 필명을 날렸던, 이제는 전혀 바쁘지 않아 별 볼일 없어진 늙은 이 그리고 공무원 출신으로 중도파를 자처하는 회색고령자, 이들을 따라붙은 50대 교민이 그들이다. 교민은 미국국적자다. 20여 년 만에 모처럼 고국을 방문했다가 시국구경 차 귀국(미국)을 미루고 있다는 사람이다.

 “이제는 슬퍼요. 나라꼴이 슬픈 게 아니라 시위군중의 모습이 그래…”

소주한잔을 입에 털어놓으면서 말문을 연 시인이 하는 말이다. 세 늙은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주억인다. 그때 젊은 교포의 반응에 논쟁이 점화되었다.

 “선배님들,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대통령령이 나쁜 짓을 했다고 해도 절차도 밟기 전에 무조건 그만두라는 건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잖아요?!”
 “공감해요…”

회색인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공무원출신 늙은이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기자출신의 말이 날아든다.

 “민주국가? 거 좋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민주국가 아니지. 그게 문제의 초점인 게야…”
 “뭐 그렇게까지 비하 하남, 쯔쯔…”

시인은 쓴 입맛을 다시면서 참견에 나선다.

 “그렇지 않아요, 선배님들?! 먹고살기 바쁘면서 수십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촛불시위를 하는 나라가 무슨 민주국갑니까?”
 “지금 민주국가네, 독제국가네 타령할 때가 아니지…”
 “대통령이 그만둔들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 마땅한 인간이 있는감?   답답혀…”
 “그래도 누군가 뽑아야지 눈감고 있을 처지가 아니지…”
 “그런데 선배님,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소리는 왜 난무합니까? 지금이 오십년, 육십년 대도 아닌데 아직도 그 소리니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이보게 자네 미국서 산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만, 그게 지금 한국의 현실이네. 그거 모르면 한국사람 아니지…”
 “그 얘기 시작하면 밤이 새도 끝도 없지, 그만하고 일찌감치 집에나 가세 쯔쯔…”           
 “결국 등이 시려 그렇다기보다 배가 아프다는 거지. 세금은 우리가 냈는데 몇몇 떨거지들만 떵떵거리면서, 위세 부려가며 살았다는 것에 부화가 도진 거라는 말이지. 우리나라 사람만의 기질인지는 모르지만, 특히 더 심한지도 몰라요.”

 늙은 기자의 총평이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낡은 시인이 취기어린 눈빛으로 일행을 둘러보며 입을 뗀다.

 “배도 아프지, 아프게 생겼어…. 조금만 더, 문턱 한 개만 더 넘으면 꽤 살만한 나라가 되려니 했는데, 별 오도깨비 같은 인간들이 권부 근처에서 온갖 짓거리를 해댔다니까 열불이 나는 게야! 그래서 이 나라가 가여워 슬프다는 거지…”

일행은 말없이 술잔을 혹은, 남은 안주접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시계는 자정 무렵에 이르렀다. 

최근의 조짐은 아니지만 우리경제의 양태는 비쩍 말라가는 나무와 같단다. 개천가에 서있으면서도 말라가는 나무란다. 나무가 성장하려면 수분을 섭취해야 한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우리경제는 그런 작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말라가고 있다.

그 양상이 기층민 쪽에서부터 더 심각하다. 하위 10%에서 지난 1년 사이에 소득이 무려 16%가 줄어들었다. 불황이라는 포탄을 서민층이 맨 먼저 받았다는 증거이다. 연쇄반응이 크게 우려된다.

일용직이나 임시직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극빈층이 늘어가고 있다. 금융기관의 연채부담이 함께 증가하고 있다. 일컬어 경제대위기의 전조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는 촛불을 든 민생의 배앓이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어 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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