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진승(陳勝)의 난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燕雀安知鴻鵠志哉 연작안지홍곡지재
연작(참새 제비)이 홍곡의 큰 뜻을 어찌 알리오 <진섭세가> 
머슴 살던 진승이 후일을 기약하는 것을 동료들이 비웃자 큰 뜻을 모른다며  

진시황이 죽고 진나라가 환관 조고의 손에 들어갔을 때 이미 반란은 대륙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조직적 봉기를 시작한 사람은 초나라 출신의 진승(陳勝)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빈천하여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신세는 처량할망정 꿈과 배포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밭일을 하다가 앉아 쉬던 중 동료들에게 “훗날 우리가 부귀를 얻는다면 서로 모른 척하지 맙시다”하고 말했다. 동료들은 이 말을 농담으로 알아들었다. “입에 풀칠하려고 겨우 머슴이나 사는 우리가 어느 세월에 부귀를 얻는단 말이오.” 그러자 진승이 한숨을 쉬면서 “오호, 연작이 어찌 홍곡의 큰 뜻을 알리오(燕雀安知鴻鵠之志哉)!”라고 말했다. 

연작(제비와 참새)는 작은 새고 홍곡(기러기와 고니)는 큰 새다. 생각이 좁은 소인배들이 큰 뜻을 어찌 알아듣겠는가 하는 의미다. 

홍곡의 꿈을 꾼 시골 머슴

마침 진시황이 죽은 그 해에 나라에서 빈민들을 징집하여 변경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군관들이 인솔하는 무리가 900명이었는데, 편의를 위하여 여러 소집단으로 나뉘어 있었고, 진승은 동료 오광과 함께 둔장(屯長)으로 뽑혀 소집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임시 소대장이나 향도쯤 되는 지위였을 것이다. 

그런데 행군도중 큰 장마를 만나 도로가 유실되는 바람에 행군이 지체되었다. 정해진 기한에 어양에 닿기가 불가능해졌다. 그 시절 진의 국법은 매우 가혹하여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지 않던가. 기한을 넘겨 도착한들 목숨이 무사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여기저기 모여 앉아 불안감과 불만을 나누었다. 

진승이 오광에게 은밀히 말했다. “지금 가도 죽고 도망해도 죽을 바에야 뭔가 해보고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기회는 다시 없네. 어차피 없어진 목숨이나 마찬가지이니,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해 사나이 목숨 한번 걸어보세.” 

진승은 세상 돌아가는 일을 제법 소상히 알고 있었다. 

“제위를 이어야 하는 사람은 마땅히 맏아들 부소인데 진시황에게 백성을 위하여 여러 차례 간언하다가 변경으로 쫓겨났었지. 듣자니 이세가 황제가 되면서 부소를 이미 죽여버렸다는군. 그의 대장 항연도 죽였다 들었네. 백성들은 부소가 돌아와 황제가 되기를 기다리는데 그가 죽은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어. 그러니 우리가 부소와 항연의 이름을 빌어 거사를 하면 천하에 호응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네.”

두 사람은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갖춘 후에 거사를 일으켰다. 회식자리에서 호송 군관을 자극하여 결투를 벌인 끝에 칼을 빼앗아 찔러죽이고 장정들 앞에 나가 연설했다. 

“그대들. 폭우 때문에 늦게 되었지만 진나라 법에 인정머리가 있던가. 이대로 어양으로 가봤자 모두 처형될 것이 분명하다. 다행히 처형을 면한다 해도 그대들은 어디로 가겠는가. 변경의 노역자나 수비병이 될 것인데, 기한도 없이 변경을 지키다가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이 10에 6-7은 된다고 한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 남자답게 뭐라도 해보고 죽자. 못할 게 뭐 있나. 왕후장상은 어디 씨가 따로 있다더냐(王侯將相寧有種乎)?”

장정들이 호응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단을 쌓고 죽은 군관의 머리를 제물로 삼아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홍곡의 꿈을 꾼 시골 머슴

진승은 장군이 되고 오광은 도위를 자칭했다. 급조된 900명의 장정들은 겨우 낫자루나 몽둥이 같은 변변찮은 무기를 가졌을 뿐이지만, 가는 곳마다 부민들이 호응하며 숫자가 금세 불어났다. 초나라의 부흥, 즉 ‘대초(大楚) 재건’을 명분으로 내걸고 부소와 항연을 따른다는 소문까지 퍼뜨리자 백성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여러 고을을 습격했는데 그 때마다 쉽사리 함락되었다. 이미 진나라로부터 마음이 떠난 향리나 고을 사람들에게는 대항해 싸울 의지가 없었다. 진나라가 내려준 벼슬을 가지고 백성들을 착취하던 수령이나 관리들은 달아나거나 맞아죽었고, 적잖은 수령들은 스스로 반군을 맞아들여 대초군에 가담하였다. 

후일 가생이 노래한 바, “미천한 사람이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세워 깃발을 만들었으나 천하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호응하고 양식을 짊어지고 그림자처럼 그를 따랐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것이다.   

진승은 군사 경험이 있는 갈영이란 사람에게 병사를 나눠주어 선봉으로 삼았다. 갈영은 이내 6-7개의 현을 정벌했다. 진승이 옛 진(陳)의 영역에 도달했을 때는 전차가 600-700량이 되고 기병이 1천 명, 병사의 수는 수만 명이었다. 이 지역에서도 수령들은 감히 대항하지 않았으며, 대초군에 저항하다 죽은 수령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진승은 이곳에서 고을 유지들과 원로들의 추대로 왕(陳王)을 자처하였으며 나라 이름도 지어 ‘장초’(張楚)라 하였다. 

진(秦)나라가 장함을 보내 함곡관에서 방어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알다시피 함양의 2세 황제는 환관 조고의 말만 믿고 아무런 걱정 없이 환락의 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군을 막아낸 장함이 부관 사마흔을 보내 보고하자 조고는 오히려 반군을 진압하지 못한다고 꾸짖기만 하였으므로, 그를 믿을 수 없게 된 장함은 진승에게 투항해버렸다. 진나라는 이렇게 해서 멸망한 것이다. 

진승군의 승리를 기화로 곳곳에서 옛 제후국의 호걸들이 제각기 독립을 선언하며 군대를 일으켰다. 우후죽순으로 일어난 군대들이 세를 다투는 와중에 진승은 자기 수하의 손에 죽었다. 그가 한 나라를 이끌 재목은 애초부터 못되었으나, 황제 같지 않은 황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백성들 사이에 최초로 저항의 기치를 들었다는 점에서 그 풍운의 가치는 빛난다. 끝내 이 혼란을 평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연 사람들이 바로 항우며 유방이었다.

“이대로 가봤자 모두 처형될 것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 남자로서 뭐라도 해보고 죽자. 우리라고 못할 게 뭐 있나. 왕후장상은 어디 씨가 따로 있다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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