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不信功臣 不親士民 불신공신 불친사민
공신들을 믿지 않고 백성들과도 거리를 두다 <秦始皇本紀> 
후대의 문인 가생이 진나라의 멸망 원인을 논하면서 진시황을 비판한 대목 

황제를 죽인 뒤 조고는 그 자신이 당장 왕이 되고 싶었지만 잠시 결정을 미루었다. 혼란 중에서도 그에게 왕이 되라고 권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이세의 조카인 공자 영(嬰)에게 닷새 동안 재계하고 종묘에 나와 옥새를 인수하라고 통보했다.

반란군에게 항복을 밀약하다 

진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허울 좋은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거니와 왕족들을 무차별 살해한 조고는 이미 왕족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원수였다. 자영은 아무 대꾸도 않고 있다가 두 아들을 불러 은밀히 지시했다.

“승상 조고는 이세를 망이궁에서 시해하고는 군신들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 거짓으로 의(義)를 내세워 나를 왕으로 세우려는 것이다. 들으니 조고는 이미 반란군들과 내통하고 있다. 초나라와 은밀히 약조하여 종실을 멸망시키고 자신이 관중의 왕이 되려 한다는구나. 이제 내가 종묘에 제배하러 가면 묘당 안에서 나를 죽일 것이다. 내가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승상 자신이 찾아올 것이니, 그가 오거든 없애버려라.”

닷새 후. 조고가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영을 불러도 영이 칭병하며 가지 않으니 조고가 직접 찾아왔다. “종묘의 일은 중대한 일입니다. 어찌하여 임금께서는 행차하지 않으십니까.”

그때 자영의 두 아들과 수하들이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는 조고를 척살했다. 조고가 살해되자 그를 위해 반항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자영은 곧 국권을 잡고 조고의 친족들과 측근들을 모두 잡아들여 삼족을 처형하였다.

자영이 왕의 직무를 대행한지 46일 되던 날, 초의 장수 패공(유방)의 군대가 함양 앞 패상에 당도했다. 자영은 곧 투항을 약속하고는 목에 올가미를 걸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천자의 옥새와 부절을 받들고 패상으로 향하는 길목에 나가 항복하였다. 패공은 영의 가족을 받아들이고 함양으로 들어가 궁실의 부고(府庫)를 봉(封)한 뒤 패상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함양에 먼저 입성했으되 승리의 결실을 초패왕 항우에게 양보하려 한 것이다.

달포가 지나 제후들의 연합군이 당도했다. 연합군의 리더로서 성품이 과격했던 초패왕 항우는 자영을 포함한 진나라의 왕족과 대신들을 살해하였으며, 끝내는 함양의 백성들을 살육하면서 궁실을 불태우고 각종 보화와 재물을 몰수하여 제후들과 나누어가졌다. 진을 정벌한 뒤 국토를 셋으로 나눠 각기 왕을 세운 뒤 스스로 초패왕(楚覇王)이라 칭하고 천하를 쪼개 제후왕들을 봉했다. 그러나 큰 나라를 돌보기에는 갑갑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자 곧 천하는 분열되었으며, 5년 뒤에는 천하가 한(漢)나라에 손에 들어갔다.

이렇게 진나라의 시대는 끝났다. 통일 대륙의 시초는 진(秦)나라였으나 그 통치기간은 겨우 15년으로 극히 짧았고, 이후 중국의 정신적 줄기는 한(漢)에 귀속되었다.

대 제국이 농민군에게 멸망한 까닭은  

한나라 초기에 유명한 문장가인 가생(賈生)이 진나라의 종말에 대해 논평하여 말했다.

- 진시황은 자만하여 남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고, 끝내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칠 줄 몰랐다. 2세는 부친의 과오를 그대로 이어받아 고치지 않았고, 포학무도하여 화를 가중시켰다. (…) 당시 세상에 생각이 깊고 시세판단을 잘 하는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감히 충성된 마음을 다하여 충성으로 간하지 못했던 것은 꺼리고 피해야 할 금기가 많아 충간을 하는 사람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하의 선비들은 귀를 기울여 듣기만 하고 두 다리를 모으고 반듯이 서서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 때문에 왕들이 도리를 벗어나도 감히 간하거나 계책을 내지 못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졌어도 왕에게 알릴 수 없었으니 애처로운 일이다. (중략)

진승(陳勝)이란 사람은 깨진 항아리 입으로 창(窓)을 삼고 새끼줄을 늘어뜨려 문을 대신할 만큼 가난하고 미천한 백성으로 고작 수자리에 징발된 장정이었다. 재능은 보통사람에도 미치지 못하고 공자나 묵적처럼 어진 덕을 지닌 사람도 아니었다. 부를 지닌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사졸들의 행렬에 끼어서 행군 중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는 지칠대로 지쳐서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느리고 수백명의 사람들을 통솔하여 가던 길을 바꾸어 진나라를 공격했던 것이다.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세워 깃발을 만들었으나 천하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호응하고 양식을 짊어지고 그림자처럼 그를 따랐다. 마침내 산동의 호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 진나라의 왕족을 멸망시켰다.

진나라의 천하는 작지도 약하지도 않았고, 옹주땅이나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도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반면 진승의 지위는 예전의 어떤 제후들보다 존귀하지 않고 호미나 고무래를 든 무리들은 예전 나라들의 병사들보다 강하지도 않았고 예전의 어떤 모사들보다 비교도 되지 않는 무지랭이들이었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는 크게 달랐으며 이룩한 공업이 상반되었던 것이다. (중략)

진나라가 동급의 여섯 나라 제후들로부터 조회를 받은 것이 백여 년이 되었다. 그런 후에 온 천하를 하나로 묶고 효산과 함곡관을 궁전으로 삼았던 것인데, 일개 필부가 난을 일으키자 칠묘가 무너지고 천자가 남의 손에 죽임을 당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무엇 때문인가. 인의를 베풀지 않고 천하를 얻을 때와 천하를 지킬 때의 자세가 달랐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탐욕스럽고 비루한 마음으로 독단적인 꾀만을 부렸다. 공신들을 믿지 않고 선비나 백성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왕도를 버리고 개인의 권위를 앞세워 문서를 금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였으며, 인의를 버리고 속임수와 무력으로 다스리고 포학한 것을 통치의 시작으로 삼았다. (중략) “안정되어 있는 백성들은 인의를 함께 행할 만하고, 위난에 처한 백성들은 함께 어울려 그릇된 짓을 하기 쉽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러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진나라는 작지도 약하지도 않았고,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도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호미나 고무래를 든 무지랭이들이 난을 일으키자 칠묘가 무너지고 천자가 죽어 웃음거리가 되었다. 무엇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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