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진시황②- 아방궁

主勢降乎上 黨與成乎下 주세강호상 당여성호하
위로는 임금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로는 붕당이 형성된다 <진시황본기> 
승상 이사가 선비들이 책 읽는 것을 금해야 하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진나라에 의한 정복이 끝났으므로 더 이상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지금까지는 정복을 위한 전쟁을 피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의 전투는 곧 반란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진나라는 과거 제후국들이 만들거나 보유하고 있던 모든 병장기를 국가의 명령으로 거두어들였다. 수도 함양에 창 칼 방패와 화살촉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곧 용광로를 설치하어 몇날며칠 밤낮으로 병장기를 녹였다. 녹인 쇳물로 거대한 종거와 거인 동상 12개를 만들었다. 동인상(銅人像) 하나의 무게가 1천석이었다. 1석(石)이 120근이었다.

(* 고대의 단위를 고찰해보면, 진나라 당시 무게 단위 1량은 15.8g이라고 한다. 1근의 단위는 16량으로, 곧 252.8g이다. 계산해보면 진시황 때 만든 동인상 하나의 무게는 3만㎏, 즉 30톤이나 되는 것이었다.)

거대한 환락의 도시 아방궁

오늘날까지도 동양에서는 최대의 사치향락을 상징하는 명칭으로 회자되는 ‘아방궁’이 이때 함양에 세워졌다.

진시황은 하나의 제후국을 정복할 때마다 그 나라 궁실을 모방한 궁전을 함양 북쪽 산기슭에 새로 짓게 했다. 함양 북쪽을 흐르는 위수(渭水)와 상림원(上林園)이라는 숲 사이다.

각국의 목수들이 끌려와 궁전을 새로 짓고, 각 나라에서 빼앗은 보물들과 종탑이 그 곳을 채웠다. 전국 7웅 가운데, 진을 제외한 한(韓)위(魏)조(趙)제(齊)초(楚)연(燕), 세칭 ‘6국 궁전(六國宮殿)’이다.

각 나라에서 제후를 받들던 악사와 미인들도 끌려와 각국의 음악과 춤과 술을 재현했다. 마치 국제문화 엑스포 같았을 것이다. 바야흐로 중국 최초의 거대 국제도시(Megalopolis)가 구현된 것이었다. 각국의 궁전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궁전과 궁전들은 물길을 건너는 구름다리와 복도들로 이어지고 중간중간 주각(周閣)들이 세워져 ‘끝없는 하나’처럼 연결되었다.  

이 공사는 수년이나 계속되었으며, 후일 아방궁(阿房宮)이라 불린 궁전은 마지막에 지어졌다. 천하통일 10년을 앞두고 진시황은 황제의 정전을 새로 짓게 했다. 위치는 상림원 내에 아방(阿房)이라는 곳이다.

거대한 다락형태의 정전 건물 하나만 해도, 동서의 넓이가 500보(步), 남북의 길이는 50장(丈) 규모인데, 위층에는 1만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으며 아래층에는 5장 높이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여기서 시작하여 사방으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궁전 아래부터 남산(南山)에 이르기까지 통하였고, 남산 봉우리에 누각을 세워 표지로 삼았다. 구름다리는 위수를 넘어 함양 시내로 이어졌다.

궁을 짓기 위해 나무를 베고 다시 나무를 심고, 돌을 캐고 쪼개며, 멀리서부터 목재를 운반하는 등의 노역에 주로 죄수들로 구성된 70만여 명의 인력이 동원됐다. 한 가운데 궁전 300채가 지어지고, 이와 별개로 함곡관에는 400채를 짓기로 했다.

이때까지 궁의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고, 궁이 완공된 뒤에 좋은 이름을 지어 붙일 계획이었으나, 궁은 진나라가 망할 때까지 완공되지 못했다. 공사가 워낙 거창했으며, 그에 비해 진시황의 나라는 너무 빨리 망했기 때문이다. 후일 세상은 이 궁전을 지명을 따라 ‘아방궁’이라 부르게 된다.

진시황이 죽기까지(또는 진나라가 망하기까지) 채 완공이 안 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지어진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거대한 궁전도시는 진시황의 사후에도 공사가 계속되어 엄청난 규모를 드러냈다. 착공한 지 10여년 만에 초패왕 항우에 의해 불태워질 때, 불이 석 달 동안 꺼지지 않았다는 기록에서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항우본기).

“선비들은 말이 많다” 생매장 

처음에 진시황은 자기 손으로 완성한 통일제국의 즐거움을 백성과 함께 느끼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나고 태평성대가 왔다고 믿은 진시황은 호위무사 네 사람과 함께 평민의 옷으로 꾸미고 함양 시내로 미행(微行)을 나갔다.

그런데 밖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자객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호위무사들 덕분에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진시황은 심히 불쾌하고 두려웠다. 황제의 미행 계획을 외부의 누가 미리 알 수 있었단 말인가.

궁실 내부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조사가 이루어지고 많은 관련자들이 처형되거나 쫓겨났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다. 천하의 여러 제후국들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룬 만큼 황제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었다. 더욱 연나라 자객 형가라든가 고점리처럼 궁실 내부로 들어와 목숨을 노리는 자도 있었지 않은가.

진시황은 그때부터 궁 밖으로 나가는 일을 그만 두었다. 궁 안에 있을 때라도 황제 곁에는 무기를 든 자가 아무도 없게 하였고, 밖으로는 백성들이 서로를 감시하는 제도를 만들어 한번 의심을 받은 자는 엄한 벌로 다스리고 혐의가 드러나는 자는 삼족을 처단하게 했다. 거대한 통일제국은 자연히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결과는 뜻하지 않게도 황제 자신이 왕실에 갇히는 꼴이 되었다. 그런 황제에게 세상의 여론을 전하고, 또 황제의 명을 세상에 전하는 일은 소수의 측근들에게 전담되었으니, 자연히 측근들의 세도권력은 황제의 권위를 대신하게 되었다.

진시황이 통치하는 내내 중국은 엄격한 통치 아래 있었다. 강력한 법을 만들어 백성의 눈과 귀를 감시하고 고관이라 하더라도 자기 의견을 함부로 말할 수 없게 했다. 1백여 년 전 효공 때 ‘상앙의 변법’이 행해진 이후 또다시 진나라는 공포국가로 변했다.

세상은 이를 ‘법치(法治)’라 부르거니와, 진정한 의미의 법치와는 거리가 먼 공포정치였을 뿐이다. 정복전쟁의 피비린내가 채 사라지지 않은 진시황 치하에서 사람의 목숨은 한층 더 가벼웠다.

“유생들은 옛것을 내세워 당세를 비난하며 백성을 미혹하니 이를 금하소서.” 승상 이사의 말에 즉시 금서(禁書)령이 내려졌다. 모든 책을 거두어 불태우고 어긴 사람 460명을 붙잡아 땅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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