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진시황①- 최초의 황제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黔首安寧 不用兵革 六親相保 終無寇賊
검수안녕 불용병혁 륙친상보 종무구적 <진시황본기> 
백성이 평안해지니 무기가 필요 없게 되었고 육친이 서로 보살피니 도적이 없어졌다.

노애의 반란이 진압되고 여불위가 물러날 때 진왕(秦王) 정(政)의 나이는 스물 셋이다. 열 세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 장양왕의 뒤를 이은 때로부터 10여년이 흘렀다. 왕실 안팎이 음란하고 혼란한 사건으로 시끄러웠음에도, 진나라에 천명(天命)이 있었던 것인지 중원의 기운은 진나라에 집중되었다. 

왕전 왕분 환의 양단화 같은 무장들이 아직 남아있는 제후국들을 잇달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고, 몰락한 제후국으로부터 지혜롭거나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인재들이 속속 진나라로 몰려들었다. 멸망한 제후국들의 저항과 반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진으로 결집되는 통일의 기운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정이 즉위한지 12년째에 문신후 여불위가 죽어 몰래 매장하였고, 20년째에 연나라 자객 형가의 사건이 있었으며, 26년에는 진나라 외에 중원에서 왕으로 칭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 천하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진왕의 나이 39세. 한창 기운이 왕성할 때다.

‘황제’ 칭호를 처음 사용 

진왕이 대신들에게 새로운 제도와 법을 제정을 명하였다. 승상인 왕관을 비롯하여 어사대부 풍겁 정위 이사(李斯) 등이 명을 받들었다. 

“옛날 오제(五帝) 시절에는 땅이 사방 천리에 지나지 않았고, 밖으로는 여러 이민족들이 할거하여 천자가 천하를 온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폐하께서 천하를 평정하고 전국에 군현을 두어 하나의 법령으로 다스리게 되었으니, 상고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고대에는 천황 지황 태황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 하므로, 신들은 황공하옵게도 존호를 ‘태황(太皇)’이라 정하여 올리고자 하옵니다.” 

그러자 진왕이 말했다. 

“태황의 황(皇)자만 취하고 오제의 제(帝)를 취하여 ‘황제(皇帝)’라 하고, 나머지는 그대들의 의견대로 하라.” 

이렇게 해서 ‘황제’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진왕은 첫 황제라는 의미에서 ‘시황제(始皇帝)’ 또는 ‘진시황(秦始皇)’이 되었고, 이후에는 왕의 시호를 따로 정하지 않고 ‘2세, 3세…’ 등으로 숫자만 이어 ‘만세’까지 부르기로 했다. 

진시황의 취지는 야무졌으나, 실제로 진시황은 이 날로부터 겨우 11년째에 죽었고, 통일제국 진의 황실은 ‘3세 황제’가 즉위한 27년째에 항우와 유방의 연합군에 의해 멸문되었다. 진나라는 변방의 부족국가로 출발하여 기원전 777년 주(周)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받았다. 그로부터 555년 만에 천하통일의 주인공이 되었으나, 겨우 27년이 지나 제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진시황은 시황제면서 동시에 진나라의 최후를 가져온 주인공이기도 한 셈이다. 

그의 시대에 대륙을 하나의 권력으로 다스리는 중앙집권제가 최초로 정착되었으며, 지방은 전국 36개 군현으로 나누는 직제가 만들어졌다. 

진나라는 검정색을 국가와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로 정했는데, 이는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오행(五行) 가운데 수(水)가 곧 진나라에 주어진 순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수는 물을 상징하며, 색으로는 검정색이고, 숫자로는 6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래서 검정색 깃발을 쓰고, 검정색 옷을 입었으며, 부절과 관을 여섯치로 규정하고, 여섯자를 1보(步)로 하는 측정 규격도 만들었다. 중원을 가로지르는 황하(黃河)는 진나라의 덕을 상징하는 큰 물(德水)로 삼았다. 

끝없는 의심, 공포정치의 원인

진나라가 최초의 거대 제국을 완성해놓고 겨우 27년 만에 막을 내린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서로 섞이기 어려운 다양한 종족과 제후국들이 하나의 체제 아래 억지로 묶였다는 이질감이 무엇보다 큰 원인이겠지만, 여기에는 진시황의 독특한 캐릭터도 한 몫을 한다. 

그는 통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배신을 경험했고, 자기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의 물리적 위협도 여러 번 겪어야 했다. 중국 각지로부터 권력을 향해 몰려드는 모사(謀士)들은 서로 재주를 겨루고 왕에게 충성 경쟁을 벌이느라 상대를 헐뜯는 말을 수없이 상소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누구를 경계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황. 진시황은 누구의 말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면서 누구의 말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진시황은 아주 의심 많은 제왕이 되었다. 의심 많은 군주는 자연히 공포정치를 펴게 된다. 화합이 아닌 분리와 감시, 견제의 정치로는 그 큰 나라를 오래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 정치체제를 논의할 때 승상 이하 신하들이 의견을 모아 건의했다. 

“이제 천하를 다 평정했지만, 연 제 초와 같은 땅은 거리가 너무 멀어 따로 왕을 두지 않으면 오래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청하오니 아드님들을 왕으로 세우도록 윤허해주소서.”

황제가 논의에 부치자 군신들이 대체로 찬성했다. 정위 이사(李斯)가 이의를 제기했다. 

“주 문왕과 무왕이 많은 자제들과 일족을 왕으로 봉해 제후국을 세우게 했으나, 후손들이 점차 소원해지고 멀어져서 서로 원수처럼 공격했고, 심지어 제후끼리 서로를 주벌하는데도 주 천자는 이를 막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천하가 폐하의 신령(神靈)으로 하나가 되어 모두 군현이 되었습니다. 아드님들이나 공신들에게는 국가의 부세로서 큰 상을 내리신다면 족할 것이니 천하에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천하를 안녕케 하는 기술이며, 따로 제후를 세우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황제가 “이제 다시 제후국을 세운다는 것은 다시 전쟁을 조성하는 일이다.”라며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진나라의 중앙집권제는 이렇게 확정되었다. 

정위 이사는 누구보다도 윗사람의 심기를 잘 읽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매번 황제의 심기를 잘 읽고 그 마음에 드는 이론을 주장했으므로 황제에겐 ‘입안의 혀처럼’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의심 많고 혹독한 진시황의 정치가 이사의 입을 빌려 시행되었다. 그 결과가 공포정치 전제정치였으며, 진시황은 결국 ‘인(人)의 장막’에 갇히게 되었다.  

진나라는 기원전 777년 주(周)나라의 제후국으로 인정받았다. 그로부터 555년 만에 천하통일의 주인공이 되었으나, 겨우 27년이 지나 역사에서 사라졌다. 진시황은 시황제면서 동시에 최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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