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천하통일(3)- 재상 여불위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東望吾子 西望吾夫 동망오자 서망오부
동쪽으로는 아들의 릉, 서쪽으로 남편의 릉을 바라본다 <呂不韋列傳> 
진(秦) 하태후가 남편 효문왕 부부릉과 아들 장양왕릉 사이에 홀로 묻히면서     

지금까지도 남자를 흔들어 나라를 망하게 한 여인들은 종종 등장했으나, 그 자신이 스스로 권력을 쥐고 음행을 일삼은 예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중국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된 진시황 이후로는 스스로 권력을 쥔 여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장양왕의 부인이자 진시황의 어미인 태후는 스스로 권력을 쥐고 음행을 일삼은 최초의 여자라 할 수 있다. 

불타오르는 권력의 밀실 

정(政)이 열 세 살의 나이로 왕이 되자 태후는 왕의 권한을 대신하게 되었으며, 실질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승상 여불위의 몫이 되었다. 태후가 누군가. 장양왕의 여자가 되어 태자를 낳았지만 본래는 여불위의 애첩이 아니던가. 남편은 죽었고 태후는 아직 젊었으며, 왕은 아직 어렸다. 남자를 홀릴만한 미모를 지닌 젊은 과부가 첫 남편이던 사람과 밀실에서 국가 경영을 공론하게 되었으니 이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더욱, 십여 년을 허약한 남편과 살았던 태후의 몸은 바야흐로 뜨거운 나이였다. 

최고 권력의 밀실에서 벌어지는 일에 누가 감히 알아서 일언반구라도 할 수 있겠는가. 한동안은 괜찮았던 것 같다. 하지만 벌써 중년을 지나고 있는 여불위의 체력이 문제였다. 

여불위가 ‘성 고문’(?)을 회피할 궁리를 하던 중에 장안에 물건이 크고 정력이 세다고 소문난 노애(嫪毐)라는 남자를 발견했다. 은밀히 불러들여 가신으로 삼고 직접 시험해보니 과연 물건은 일찍이 본 적 없을 만큼 장대했고, 여러 가지 물건을 실로 매달아 걸어보니 매번 거뜬히 들어올렸다. 오동나무로 된 수레바퀴를 줄로 매달고 방안을 걸어 다닐 정도였다. 여불위는 은근히 그 소문을 태후궁에 퍼뜨렸다. 태후가 소문을 듣고 여불위에게 이 남자를 보게 해달라고 청했다. 여불위는 은밀히 노애를 데려가 태후에게 선물했다. 

태후는 노애를 곁에 두고 싶어 했지만, 멀쩡한 사내가 궁에 머물 수는 없었다. 여불위는 먼저 사람을 시켜 노애를 적당한 죄목으로 고발하게 했고 노애는 법에 의해 거세형 판결을 받게 했다. 그런 다음 형을 집행하는 간수에게 손을 써서 형이 잘 집행된 것처럼 서류를 꾸미게 한 후 실제로는 남성의 기능을 빼앗지 않게 했다. 서류상으로만 거세형을 받은 노애는 수염과 눈썹까지 뽑아 완벽한 고자로 위장했다. 어쨌든 고자가 되었으니 노애는 태후궁(기년궁)에 내시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 노애는 호위내관처럼 밤낮없이 태후의 곁을 지켰고, 태후는 노애를 총애하여 더 이상 여불위를 찾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벽에도 귀가 있고 소문은 두려운 법이다. 게다가 밤과 낮이 따로 없이 즐기다가 씨앗을 맺어 태후가 임신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태후는 점쟁이를 불러들여 불길한 운이 다가오고 있으니 이를 피하기 위해 당분간 거처를 바꿔야 한다(避時)는 점괘를 얻고는, 그 핑계로 멀리 옹읍에 별궁을 지어 측근들과 함께 옮겨가 살았다. 노애는 태후의 권한으로 많은 선물과 포상을 받아 그 자신이 점차 부유해졌다. 개인의 노비만도 수천 명이 되었으며 벼슬을 청탁하려고 뇌물을 들고 줄 선 선비들도 천명이 넘었다. 

문신후 여불위 영욕의 최후 

영예가 지나치면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노애의 호가호위(狐假虎威)가 지나쳤다. 한갓 내시 신분으로 막강한 부와 권력을 거머쥐었으니 의심받지 않기는 어려웠다. 

왕이 스무살 되던 해에 마침내 노애에 대한 고발장이 제출되었다. 

‘노애라는 자는 고자가 아니옵니다. 고하기 황송하오나, 그는 수행원의 자격으로 태후를 모시면서 간통한지 오래이며, 아들까지 둘이나 낳아 숨겨 기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감히 태후와 모의하여 ’시황이 죽으면 우리 아들을 후사로 삼자‘고 한다 하니 처벌해야 합니다.’ 

왕은 은밀히 관원을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노애의 실체가 드러나고 이 일에 상국 여불위까지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노애를 제거하려고 준비를 하는 중에 노애가 알아채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관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노애는 처형되고 태후가 낳은 두 아들을 포함하여 삼족이 몰살되었다. 노애의 가신들은 재산을 몰수하여 촉 땅으로 추방하였으며 태후는 다시 옹읍으로 유배되었다. 

문신후 여불위. 왕을 만들었고, 왕을 낳았으며, 태후의 본래 남편이자 후견자였던 여불위의 운도 다하였다. 노애가 반역음모죄로 처단되었으니 여불위도 무사하긴 어려웠다. 

처음에 왕은 여불위를 함께 제거하려 하였으나, 국가의 유력자들이 모두 여불위의 사람들이었다. 유세가들이 그가 선왕을 받든 공을 내세워 변호하였기 때문에 왕은 차마 법대로 집행하지 못하고 단지 상국의 지위에서 파면하는 것으로 그쳤다.

1년 뒤에 왕은 유세가 모초의 조언에 따라 태후를 다시 함양으로 돌아오게 했는데, 그 사이에도 여불위에 대한 회의가 깊어져서 마침내 그를 하남으로 떠나가게 하였다. 문신후가 하남으로 떠날 때 그를 배웅하고자 길가에 나온 빈객과 여러 제후들의 사절들이 긴 행렬을 이루었다. 진왕은 그 세력을 보고 오히려 문신후에게 두려움을 품었다. 왕은 곧 편지를 보내 문신후를 꾸짖었다. “대체 그대가 나라에 무슨 공이 있기에 진나라는 그대를 하남에 봉하고 10만호의 식읍을 내린 것이오? 그대가 무슨 친족관계가 있기에 나는 그대를 아버지(仲父)로 불러온 것입니까? 이제 끝이오. 그대는 가족을 거느리고 촉땅으로 떠나시오.”

변방으로 떠나라는 것은 완전히 버리겠다는 뜻이다. 왕의 측근에는 자신이 식객 중에서 천거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언제까지 자기를 보호해줄 지도 알 수 없었다. 권력은 변하게 마련이고, 충성심의 물길도 변하는 권력을 따라 바뀌게 마련이다. 여불위는 긴 여행을 떠나는 대신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그제야 진왕은 촉으로 추방했던 노애의 가신들이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이제 진시황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과연 물건은 장대했고, 힘은 오동나무 바퀴를 매달고 방안을 걸어 다닐 정도였다. 태후가 소문을 듣고 이 남자를 보게 해달라고 청했다. 여불위는 노애를 데려가 태후에게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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