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천하통일(2)-재상 여불위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人之賢不肖譬如鼠矣 인지현불초비여서의
사람이 잘나고 못난 것은 쥐들의 행동과 같다(제 하기 나름) <李斯列傳> 
여불위의 식객 이사(李斯)가 고향 초나라에 있을 때 깨달은 처세훈 

이렇게 공작을 마친 여불위는 조나라 한단으로 돌아갔다. 곧 여불위의 집에서 자축연을 벌여 함께 술을 마셨는데, 자초는 여불위의 아리따운 애첩을 보고 한눈에 반해 그녀를 요구했다. 여불위는 순간 매우 불쾌했다. 아무리 왕자라지만 친구로서 탐내지 말아야 할 것을 탐내다니. 역겹고 화가 났다. 하지만 여기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큰 사업가답게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동안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목적을 성사시켰고 자초가 왕이 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역겹더라도 참아야 했다. 여불위는 이를 악물고 애첩을 자초에게 들여보냈다. 애첩은 자초에게로 들어가기 전 이미 임신한 상태였는데, 이를 숨기고 공자와 살면서 아들 정(政)을 낳았다. 자초는 기뻐하며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천자의 솥이 진나라로 넘어가다  

진 소왕 50년에 진나라가 한단을 포위했다. 전세가 다급해지자 조나라는 인질로 와있던 자초를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이번에도 구원투수는 여불위였다. 황금 500근으로 자초를 지키는 관리를 매수하여 탈출했다. 자초는 무사히 진나라 진영으로 들어갔다. 자초의 부인과 아기는 한단에 남았으나 워낙 조나라 부호의 딸이었으므로 잘 숨어서 목숨을 부지했다.

진나라와 중원 국가들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진나라는 장평에서 조나라에 타격을 입힌 이후 위나라를 공격하고 한나라를 공격했다. 2년 뒤에는 드디어 주(周)나라를 멸망시키고 천자의 솥(九鼎)을 진으로 가져왔다.

주나라(東周)의 마지막 천자는 난왕(赧王)이었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싸우고 있었는데. 초군이 한나라의 옹지라는 성을 포위하여 물러가지 않자 한나라는 주나라로부터 식량과 갑옷을 징발하려 할 정도였다. 주 천자를 정점으로 한 제후시대는 끝난 지 오래였으나 주나라는 아직 천자의 기물을 갖고 있다는 명목 하나로 천자국의 명분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나라들마다 천자의 기물을 탐냈다. 주나라는 유세가들의 변설에 힘입어, 양(梁)과 친했다 한(韓)과 친했다 혹은 진(秦)나라의 편을 들어주는 식으로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주 난왕은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진과 친교를 맺었으나, 삼진(三晋)이 합종하여 진나라와 맞서자 진을 배반하고 삼진과 동맹을 맺었다. 진 소왕이 분노하여 주나라를 치니 주왕은 진으로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하였다. 주나라는 남아있던 36개 읍과 3만의 주민을 모두 진에 바쳤다. 진나라는 이로써 천자의 기물을 얻게 되었으므로 난왕을 살려주었다.

중원을 석권한 진 소왕도 얼마 뒤에 죽었다. 곧 안국군이 왕이 되자(효문왕), 화양부인이 왕후가 되었고, 그녀가 양아들로 삼은 자초는 태자가 되었다. 조나라가 자초의 부인과 아들 정을 잘 받들어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효문왕은 즉위한 지 1년 만에 죽었고, 자초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장양왕이다. 양모이자 선왕의 비인 화양부인을 화양태후로 받들고, 생모인 하희는 하태후로 받들었다.

상인 여불위는 ‘통 큰 투자’ 10년 만에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자초 효문왕은 그 약속을 지켰다. 외롭고 우울하던 청년시절부터 재물과 지혜로 자신을 후견하던 여불위에게 자초는 “일이 잘 된다면 진나라를 그대와 함께 누리겠소”라고 약조했었다. 장양왕의 즉위와 동시에 여불위는 승상이 되었고, 문신후(文信侯)라는 후작의 직위를 얻었다. 하남의 낙양에 10만호의 식읍이 포상으로 주어졌다. 10년 전 투자한 일천금은 아무 것도 아닐 정도로 재산이 늘어난 것은 둘째치고 천하에 두려울 것 없는 최강국의 실권자가 되었으니 상인으로서의 투자감각은 오늘날의 워렌 버핏이 문제가 아니다. 진나라의 수도는 장안이지만, 주나라 700년의 도읍이자 춘추전국시대 문화와 경제의 중심이 바로 낙양(낙읍)이었다. 여불위는 왕에 못지않은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된 것이 분명했다.

여불위는 어린 왕의 양부가 되다

그런데 장양왕은 오래 살지 못했다. 왕이 된지 겨우 3년 만에 죽어 그 아들 정(政)이 왕이 되었다. 그때 나이 겨우 13세였다. 그가 후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시황제)이다.

그가 왕이 될 때는 이미 중원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진에 복속하고 있었는데, 정은 이후로도 26년 동안 정복전쟁을 계속하여 39세에 중국 땅 모든 곳의 지배자가 되었다. 시황제란 칭호를 사용한 것은 천하를 쟁패한 이후다.

처음에 왕은 어렸기 때문에 생모인 태후가 섭정하여 여불위를 비롯한 대신들의 의견으로 국사를 처리했다. 재상 여불위는 상국(相國)으로 불렸고, 왕은 그를 중부(仲父)라 불렀다. 아버지처럼 받들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태후가 누군가. 장양왕이 태자시절 여불위에게서 데려가기 전까지 여불위의 애첩이던 여자였다. 왕에게는 ‘어머니의 전남편’이 되는 셈이다. 그뿐인가. 태자에게 가기 전에 이미 임신 중이었다고 하니, 여불위는 왕의 친아버지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진왕 정은 단지 진나라 선조인 전설 속 삼황오제 전욱의 후예이며, 여수- 대업-비자(非子)-진중의 대를 이은 후손이자 효문왕-장양왕의 자손으로 살았을 뿐이다. 그의 성은 조(趙)씨였고 이름은 정(政)이었다.

진나라 선조는 본래 영(嬴)씨였는데, 후손들이 각 지역에 봉해지면서 서(徐) 담(郯) 거(筥) 황(黃) 강(江) 진(秦) 종려, 운엄, 도구, 장량, 수어, 백령, 비렴 등의 성으로 갈라졌다. 조(趙)라는 성은 중시조인 조보에게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여불위는 맹상군 평원군 신릉군 같은 당대 중원의 군자들이 경쟁적으로 선비들을 불러들이는 것을 본받아 집을 개방하였다. 그의 집에 모여든 식객의 수가 마침내 남부럽지 않은 3천명에 이르렀고, 집에서 일하는 하인의 수는 1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전 재산을 쏟아 부어 일을 성사시켰고, 자초가 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역겹더라도 참아야 했다. 여불위는 이미 임신한 애첩을 자초에게 들여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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