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영웅시대(3)-甘羅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取十官而無罪 취십관이무죄
열 가지 벼슬을 지냈으면서도 허물이 없다 (<史記> 樗里子甘茂列傳)
초나라 범연이 자기 왕에게 감무의 청렴성과 현명함을 설명하면서 

선태후가 젊은 소왕을 대신해 국정을 주무르면서 진(秦)나라의 국정 방향은 크게 뒤흔들렸다. 태후가 초(楚)나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초나라와 우호관계가 되었고, 태후의 고향 친족으로 태후가 데려다 기른 상수(向壽)는 진나라의 권력자가 됐다. 선대의 공신이던 감무는 이제 뒤켠으로 밀려나 눈치나 봐야 하는 신세였다.

감무는 한(韓)나라를 정복하여 진에 복속시킨 사람인데, 초나라가 호시탐탐 한나라를 탐내서 공격하려 하므로 감무는 한과의 맹약을 지키기 위해 이를 막아주어야 했다. 때문에 아무래도 초나라에 기울어진 실세들과의 암투가 불가피했고, 결국은 상수와 공손석 등에게 미움을 사서 진나라를 떠나야 했다.

경쟁국에는 모자란 인물을 천거해야

진에서 달아난 감무는 제나라로 가서 얼마 후 상경이 되었는데, 제나라 민왕이 그를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진나라가 그 사실을 알고 초 회왕에게 감무를 진나라에 돌려보내줄 것을 청했다.

초 회왕이 결정을 미루고 지략가 범연에게 물었다.
“진나라가 감무를 귀국시켜 달라 하오. 지금 감무를 돌려보내 재상으로 삼도록 추천할까 하는데 괜찮겠소?”라고 묻자 범연이 말했다.

“안됩니다. 그의 스승 사거는 시골의 감문에서 수문장이나 하면서 조용히 지낸 사람입니다. 크게는 벼슬을 구하지 않고 작게는 집안을 일으키려 욕심내지 않으면서 원만하게 지낸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감무는 그를 섬기며 배웠고, 현명한 진 혜왕이나 매서운 무왕을 잘 섬겼으며 변설에 능한 장의에게도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열 가지 벼슬을 하면서 한 번도 허물을 만든 적이 없는 사람이니 감무는 진정 현명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진나라의 재상이 된다면 초나라에는 득될 것이 없습니다. 임금께서는 예전에 소활이란 사람을 월나라에 재상으로 천거해서 보냈는데, 뒤에 장의가 내란을 일으키자 월나라가 어지러워져 월나라의 강동지방을 초나라에 편입할 수 있었습니다. 소활의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 초나라가 득을 본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에 재상을 추천하고자 한다면 상수가 적임자입니다. 상수는 마침 진나라 임금과 어려서부터 서로 옷을 같이 입을 정도로 친숙합니다. 이런 이유를 들어 상수를 진나라 재상으로 추천한다면 장차 초나라에 이익이 될 것입니다.”

정작 진나라를 위해 필요한 인물이었던 감무는 결국 진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5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지만, 감무 집안에 태어난 천재소년의 일화를 여기서 알아보자. 감무의 가족들은 진나라에 그대로 남아있었으므로 그의 손자 감라(甘羅)는 진나라에서 태어났다. 세월은 흘러 진시황이 한창 다른 제후국들을 정복하고 있을 때다. 문신후 여불위가 재상이었는데 감라는 12세의 나이로 문신후를 섬겼다.

감무의 가통을 이은 천재소년 감라

시황제는 연나라와 손잡고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조나라 땅을 빼앗기 위해 연나라 출신인 채택을 연에 사신으로 보냈다. 3년 뒤 연나라가 태자를 인질로 보내왔다. 진은 곧 대부 장당을 연나라에 보내 재상이 되게 한 뒤 조나라의 하간(何間)을 협공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신후가 장당에게 연나라에 가도록 명하니 장당이 주저했다. “신이 일찍이 소왕의 명령으로 조나라를 정벌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조나라가 신을 원망하여 ‘장당을 사로잡는 자에게 100리의 땅을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연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나라를 거쳐야 하므로 신은 갈 수가 없습니다.”

문신후는 불쾌했지만 사정이 그러한 걸 알면서 강요할 수도 없었다. 감라가 문신후에게 “신이 그를 가도록 설득하겠습니다”하고 나섰다. “그만 두어라. 내가 직접 청해도 듣지 않는데 어떻게 그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감라는 “향탁은 일곱 살 때 공자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신을 시험해보시지도 않고 꾸지람부터 하십니까.”하고는 겨우 승낙을 받았다.

감라가 장당에게 가서 “그대와 무안군(에전 소왕 때의 명장 백기) 중에 누구의 공이 더 큽니까?”하고 물었다. 장당은 “무안군은 전쟁에 나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명장이다. 나를 어찌 감히 무안군에 비하겠는가”라고 대답했다. 감라는 또 “소왕의 재상 응후와 지금의 문신후 가운데는 누구의 힘이 더 크다고 보십니까?”하고 물었다. 장당은 “응후의 권세는 문신후의 힘에 미치지 못하지.”라고 답했다. 그러자 감라가 말했다. “공이 많았던 무안군도 응후가 조나라를 치라 할 때 받들지 않고 함양을 떠났다가 10리도 못가서 자결을 명받았습니다. 이제 문신후께서 몸소 그대에게 연나라의 재상이 되기를 청하였는데도 가지 않으려 하다니, 나는 그대가 어디서 죽음을 맞이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당은 떨면서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 하겠소. 당장 준비하리다.”

장당이 출발하기 전에, 감라는 다시 문신후에게 가서 조나라에 보내주기를 청했다. 문신후가 감라를 진시황에게 소개하니 진시황이 감라를 사신으로 임명해 조나라에 가게 했다. 조나라 양왕은 도성 밖까지 나와 감라를 마중했다. 감라가 말했다.

“지금 연나라 태자가 진나라에 오고 진나라의 장당이 연나라에 가서 재상이 되려는 것은 두 나라가 서로 연합이 약속을 지키자는 뜻입니다. 진과 연이 연합하는 것은 조나라를 쳐서 하간의 땅을 취하려는 것입니다. 왕께서는 가만히 두고 보실 게 아니라 하간의 땅을 먼저 떼어 진나라에 선물하고 진과 화친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조 양왕이 감라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진나라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전에 목적한 하간을 얻게 되자 연나라 태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냈고 장당은 연나라에 갈 필요도 없었다. 진과 동맹이 된 조나라는 연나라를 쳐서 30개의 성을 빼앗은 뒤 그 중 11개를 진나라에 선물했다.

“천하 명장 무안군도 응후가 조나라를 치라 명할 때 받들지 않았다가 곧 사사되었습니다. 지금 문신후께서 몸소 청하시는 데 거절하다니, 그대가 어디서 죽음을 맞이할지 알 수가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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