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상앙의 법치(1)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疑行無名 疑事無功 의행무명 의사무공
확신 없는 행동에는 공명이 없고 확신 없는 사업에는 성공이 없다  <商君列傳>
국가개혁을 원하면서도 망설이는 진 효공에게 공손앙이 담론하며 

춘추시대에 큰 제후였던 위(衛)나라가 지리멸렬된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위나라 제후의 서출 공자들 가운데 공손앙(鞅)이라는 사람이 현명하였으나 나라가 이미 기울어 재능을 쓸 곳이 없을 것을 알았으므로 일찌감치 위(魏)나라로 갔다.

앙은 재상인 공숙좌를 섬겨 중서자(대부의 집사)가 되었는데, 아직 왕에게 천거되지 못했다. 공숙이 나이 많아 병이 위중해지자 위 혜왕이 손수 문병을 와서 나라의 미래를 상의했다. 공숙이 공손앙을 후임자로 천거했다. 위 혜왕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돌아갔으나 측근들에게 “공숙이 나라를 앙에게 맡기라고 하다니, 병이 깊긴 깊구나”하고는 앙을 쓰지 않았다.

공숙좌는 태연하게 공숙좌의 임종을 지킨 후에 진(秦)나라 효공이 두루 인재를 구한다는 말을 듣고 진나라로 갔다.

옛 법을 뜯어고치다

진나라의 유력자인 경감이 효공에게 앙을 천거했다. 앙이 효공을 만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효공은 흥미 없어 했다. 경감에게 “그대가 천거한 사람은 망령된 사람이니 어찌 쓰겠는가”하고 책망하였다. 앙은 이번에는 다른 말을 해볼 터이니 다시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두 번째 만나서 다시 유세했으나 효공은 역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앙이 경감을 졸라 또 한 번 만났는데, 그제야 효공은 경감에게 “이번에는 좀 괜찮은 것 같았소. 들을 말이 있구려”라고 말했다. 공손앙이 전해 듣고 “이젠 왕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를 분명히 알겠습니다”하면서 한번 더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는 쉽게 면담이 성사되었다. 효공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앉을 만큼 열중해서 들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드렸기에 이리도 심취해서 들으셨단 말이오.”

집에 돌아온 앙에게 경감이 묻자 앙이 말했다.

“처음에는 삼황오제의 도리를 가지고 진언했더니 왕께서는 너무나 멀고 길어서 기다릴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에 춘추시대 오패의 도리를 가지고 말씀드리자 들어볼만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나라를 부강하게 할 보다 현실적인 대안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앙이 삼황오제의 높은 이상으로 말할 때 왕은 그것을 이상론이라 여겨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고, 보다 현실에 부합할 계책을 말하자 비로소 앙을 지혜로운 사람이라 여겼던 것이다.
효공은 곧 앙을 등용했다.

앙이 왕을 등에 업고 강력한 개혁정책을 펴나가자 개혁을 주저하던 대부와 관리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상앙은 개혁을 뒷받침할 법을 많이 만들었다. 법은 강력하며, 누구도 예외없이 그 법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함부로 법을 비판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설사 왕의 친척이라 하더라도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공포정치였다. 기강이 흐트러진 나라에서 강권 통치는 급속히 국력을 모으는 데 효과적인 것이 사실이다.

진나라는 급속히 강력해졌다. 앙의 지위는 좌서장, 대량조 등의 중간 직급을 거쳐 재상이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영지를 갖고 상군(商君)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후 공손앙은 상앙(商鞅)이라 불리게 되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마침 위(魏)나라에서는 지략가인 방연이 죽은 후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상앙이 효공에게 건의하여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치러 갔다. 위 공자 앙(卬)이 군사를 이끌고 맞서 나왔다. 상앙이 무명시절 위나라에 있을 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상앙은 공자 앙에게 전령을 보내 “우리가 본시 친숙한 사이이니 어찌 차마 서로를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직접 만나 맹약을 맺고 화친하여 서로 평안하게 합시다”하며 자기 진영으로 초대했다. 위공자 앙이 초대에 응해 상앙의 진영으로 찾아오자 상앙은 술을 접대하다가 미리 매복시킨 군사들을 시켜 공자 앙을 사로잡고는 곧바로 군사를 몰아 위나라 진영을 덮쳤다.

위군은 대패하여 돌아갔다. 위나라는 이미 제나라 손빈에게 여러 차례 격파당하고 진에게도 시달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으므로 대량(大梁)으로 천도했다. 위 혜왕은 이때부터 양 혜왕이라 불렸다. 천하를 주유하던 맹자(孟子)에게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묻던 늙은 양 혜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예전에 공숙좌가 임종하면서 공손앙을 천거한 일을 기억하고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처음에 공손앙이 효공을 만났을 때, 효공은 국가의 개혁을 원하면서도 차마 법도를 함부로 바꾸지 못하여 망설이고 있었다. 앙은 “확신 없는 행동에는 공명이 따르지 않으며, 확신 없는 사업에는 성공이 없습니다(疑行無名 疑事無功)”라며 효공의 결심을 부추겼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세인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탁견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사람들로부터 오만하다는 소리를 듣게 마련입니다(且夫有高人之行者 固見非於世, 有獨知之慮者 必見敖於民).”

조정에서 토론할 때에 다른 대신들의 의견에 반론하여 말했다. “보통사람들은 옛 풍속에 안주하고 학자들은 배운 바에 빠져버립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법을 지키는 일은 할 수 있어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문제는 논의하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에 의해 다스려질 뿐이며, 현명한 자는 예를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에 구속될 뿐입니다(智者作法 愚者制焉, 賢者更禮 不肖者拘焉).”

공손앙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세인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탁견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사람들로부터 오만하다는 소리를 듣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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