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순우곤의 주도(酒道)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前有墮珥 後有遺簪 전유타이 후유유잠
앞으로는 귀걸이가 떨어지고 뒤로는 비녀가 흐트러지다 <사기>滑稽列傳)
순우곤이 주량을 설명하는 가운데, 남녀가 편안히 뒤섞여 마시는 상황을 묘사하며   

전화(田和)가 제나라를 차지한 때로부터 30년이 흘러 손자 전인제가 제후가 됐다. 처음에 인제는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주색에 빠졌으며 고작해야 수수께끼나 즐길 뿐이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순우곤이라 하는 대신이 수수께끼를 통하여 제후를 깨우치자 인제는 곧 정신을 차리고 정사를 바로잡았다. 애초에 전화가 국권을 잡은 지 2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제나라는 아직 안정을 찾기도 전에 이웃나라로부터 연속 침공을 당했다. 30년 사이에 진(秦) 위(衛) 노(魯) 조(趙) 한(韓) 위(魏)나라들이 최소 한 번씩은 침공해왔으며, 이로 인해 제나라는 많은 손실을 입었다.

단번에 기강을 바로잡다

전인제가 정신을 차려 정사를 바로잡고 군대를 정비하자 이웃나라들은 그동안 점령했던 제나라 땅에서 하나둘 물러났다. 이후 비로소 군주의 위엄을 갖추고 스스로 왕(王)을 자칭하니, 그가 바로 제 위왕(威王)이다.

위왕은 처음에 전국의 현령 72명을 소집하여 그동안의 공과를 따졌다.

위왕이 즉묵의 대부에게 말했다. “그대가 즉묵을 다스린 뒤로 그대를 비방하는 말이 매일 끊어지지 않았소.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밭을 개간하여 백성에게 나눠주고 관에는 공무가 밀리지 않았으며 지역은 태평하였소. 그런데도 비방의 말이 많았던 것은 그대가 과인의 측근들에게 명예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왕은 상으로 1만호의 식읍을 내렸다.

아(阿)의 대부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아를 통치하는데 날마다 칭찬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사람을 시켜 조사해보니 밭은 개간하지도 않고 백성들은 빈곤하였소. 조나라가 견을 공격했을 때는 백성을 구하지 못했고, 위나라 사람들이 설릉을 차지했는데 알지도 못하고 있었소. 그런데도 칭찬하는 소리가 많았던 것은 그대가 과인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주어 명예를 구했기 때문이 아닌가.” 아의 대부는 팽형을 당했다.

꼼꼼한 실사를 바탕으로 상벌을 분명히 하니 단번에 나라의 기강이 바로잡혔던 것이다.

위왕 8년에 초나라군이 쳐들어왔다. 위왕이 순우곤에게 황금 100근과 거마 10대를 주고 조나라에 선물하여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다. 순우곤은 명령을 받자 하늘을 우러르며 크게 웃었다. 왕이 기분이 상해서 말했다. ‘선생은 이 선물이 적다고 웃는 것이오?’

곤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저 어제 길에서 본 일이 생각나 웃었을 뿐입니다.”라면서 말을 꺼냈다. “어떤 사람이 길가에서 풍작을 빌고 있었습니다. 그가 돼지 발 하나와 술 한 잔을 손에 잡고서 하늘에 빌며 말하기를 ‘높은 밭에서는 그릇에 가득, 낮은 밭에서는 수레에 가득, 오곡이여 풍성하게 우리 집에 넘쳐라’ 하더군요. 신은 그 손에 잡은 바가 그처럼 작으면서 원하는 것은 그처럼 사치스러우니 웃음이 났던 것입니다.”

위왕이 뜻을 알고 황금 1천 일과 백벽 열쌍, 거마 100대를 예물로 내놓았다. 곤이 선물을 가지고 조나라에 가니 조왕은 정예병사 10만과 전차 1천승을 지원해주었다. 초나라가 이 소식을 듣고 그날 밤으로 철수해 돌아갔다.

무한정 마시면 슬퍼집니다

순우곤이 돌아오자 위왕은 환영연을 베풀었다.

왕이 곤에게 ‘선생은 주량이 얼마나 되십니까’하고 물었다. 곤이 대답했다.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一斗亦醉,一石亦醉).”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한 말을 마시고 이미 취한다면 어떻게 한 섬을 마신단 말이오.”

곤이 답했다.
“대왕이 계신 자리에서 술을 마시자면 곁에는 법을 집행하는 관원도 있고 어사가 뒤에서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빼놓지 않고 기록을 할 터이니 곤은 두려워 엎드려 마시게 됩니다. 한 말을 채 마시기도 전에 취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을 모시고 귀한 손님과 함께 마신다면 곤은 옷깃을 바르게 하고 꿇어앉아 술을 정중히 따르고 잔을 받느라 자주 몸을 일으켜야 할 터이니 두 말을 못 마시고 취할 것입니다. 만약 사귀던 벗과 오랜만에 만나게 되면 즐거워서 지난 일들을 말하고 감회를 나누며 마실 터이니 대여섯 말을 마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을의 모임으로 남녀가 섞여 앉아 서로 상대방에게 술을 돌리고 장기와 투호를 벌이면서 상대를 구하고, 남녀가 손을 잡아도 벌이 없고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어색하지 않으며 앞에서는 귀거리가 떨어지고 뒤에서는 비녀가 어지러이 흩어져도 괜찮은 자리라면 곤은 이런 것을 좋아하여 여덟 말 정도를 마셔도 2-3할 밖에는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술자리가 파하게 되면 술통을 모으고 자리를 좁혀서 남녀가 동석하고 신발이 서로 섞이며 술잔과 그릇이 어지러이 흩어지고 마루 위의 촛불이 꺼집니다. 이윽고 주인이 곤만을 머물게 하고 다른 손님들을 배웅한 뒤에 엷은 비단 속옷의 옷깃이 열리면 은은한 향기가 풍깁니다. 이런 때라면 곤의 마음이 가장 기뻐지므로 한 섬은 마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고 하는 것인데, 모든 일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주도(酒道)를 논하면서, 사물이 극도에 이르면 안 되며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쇠한다는 것을 비유로 간한 것이다. 위왕이 ‘좋은 말씀이오.’하고는 밤새 마시기를 그만 두었다.    

대왕이 계시다면 한 말을 마시기 전에 취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녀가 섞여 앉아 앞에서 귀걸이가 떨어지고 뒤에서는 비녀가 어지러이 흩어져도 괜찮은 자리라면 여덟 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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