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공자(3) 이상정치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與其進也 不與其退也 여기진야 불여기퇴야
오는 사람은 받아들이고 가는 사람은 막지 않는다. <論語>述而편)
편벽하기로 소문난 互鄕 사람이 배우러 오자, 공자가 과거를 묻지 말고 받아들이라며

제나라에서 돌아온 후 꽤 많은 시일이 흘렀으나 공자는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새 군주 정공(定公)은 공자를 채용하고 싶었으나 삼환의 눈치를 보느라 실행하지 못했다. 삼환(계손 숙손 맹손)은 공자가 입각하면 군주의 힘이 강해져 자신들이 견제받게 될 것을 우려해 이를 싫어했던 것이다. 공자를 꼭 정치에 참여시킨다면 자신들의 계보에 들어오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공자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계씨들은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서 몇몇 사람을 추천받아 책임자로 등용했다.

양호가 돼지고기를 보내다

삼환 중 계씨 집안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던 양호라는 사람이 공자를 자기 계파에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공자가 젊은 시절 계씨 집안 행사에 초대받아 갔을 때 면박을 주었던 사람이다. 본래 야심가인 양호는 장차 대부의 자리를 노리면서 먼저 계씨 가문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계씨 아닌 자기 자신의 인맥을 구축하려 애쓰고 있었다. 공자는 학자로서 명성이 높을 뿐 아니라 휘하에 수백명을 헤아리는 유능한 제자들이 있었다. 때문에 양호는 어떻게든 공자와 줄을 잇고 싶어서 마주치기만 하면 벼슬자리를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공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양호와 인연을 맺고 벼슬길에 나설 생각이 없었다.

그와 마주치는 걸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공자가 집을 비운 사이에 양호가 삶은 애저(새끼돼지)를 보내주었다. 예법에 따르면, 주인이 없을 때 윗사람이 선물을 보내오면 받은 사람은 곧 윗사람을 방문하여 그에 대한 사례를 해야 했다. 예를 중시하는 공자라면 반드시 자기 집에 찾아올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마주치기 싫지만 찾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공자는 양호가 집에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예의를 지키면서도 그를 보지 않으려고 꾀를 낸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양호와 마주쳤다. 꼼짝 없이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자기 재주를 감추고 나라가 어지러움 속에 빠지든 말든 내버려두는 것이 어진 사람이오? 어진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 두려운 거겠지. 정치에 나가고 싶어 하면서도 기회를 잃은 것이 현명한 일이오?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없을까봐 두려운 거겠지. 세월은 가게 마련이고 당신을 기다려주지도 않을 거요.”

공자는 마지못해 “나도 조만간 관리가 될 것이오”라며 얼버무렸으나 끝내 양호와 연을 맺지 않았다.

마침내 권력을 손에 쥐고

기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찾아왔다. 당시 정공은 삼환을 비롯한 대부들의 세도에 치여 군주로서의 힘을 잃고 있었고, 군주를 좌지우지하는 계환자는 정작 자기 가신인 양호와 공산불뉴 등의 힘을 제어하지 못해 자기 문파를 통째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계환자로서도 능력있는 제 삼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제후와 실세의 이해가 들어맞아 마침내 공자는 공직에 오르게 되었다.

처음 맡은 관직은 중도(中都)의 재상자리였는데, 중앙관직은 아니지만 서울시장과 같은 비중있는 수령의 자리였다.

공자는 평소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을 실제 정치를 통해 입증해보였다.

“명령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형벌로 구속한다면, 백성들은 일시적으로 범죄를 모면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범죄가 수치스러운 일임을 깨닫지는 못할 것이다. 백성에게 수치심을 가르치면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게 된다.”

일 년이 지나자 도성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졌다. 백성들은 성실히 일하기를 즐거워하고 노인은 존경받고 어린이들은 사랑을 받으며,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모욕하는 일이 사라지고 사치와 음란 퇴폐한 일이 사라졌으며, 장사꾼들은 물가를 속여 팔지 않았다. 그러자 나라 안팎의 수령들이 그의 정치방법을 배우려했다. 이로써 공자는 노나라에서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다.

정공은 곧 공자를 노나라의 사공으로 승진시켰고, 다시 사구(司寇)로 발탁했다. 사법과 치안을 관장하는 사구의 권한은(삼권분립의 개념이 없던 시대였으므로) 매우 컸다. 일찍이 진(晉)나라에서 도안고라는 사람이 사구의 벼슬에 앉은 기회를 이용하여 최대의 정치실세인 조돈(趙盾) 일가를 일거에 멸족시켰던 일이 기억날 것이다.

그러나 사구가 된 공자는 법으로 벌주어 다스리는 것보다 인의(仁義)를 가르쳐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은 정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로 다투지 않으면 판결할 일이 없고, 판결할 일이 없으면 처벌할 일도 없게 되게 될 것이다.

당시 노나라에 양을 파는 심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침마다 양들을 냇가로 끌고가 물을 잔뜩 먹인 뒤 저울에 달아 팔았다. 공신이라는 사람은 처가 음탕하기로 소문나 있었으나 내버려두고 있었고, 신귀라는 사람은 사치스럽고 오만하여 손가락질 받고 있었다.

공자는 이들에게 억지로 법을 들이대지 않았다. 다만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풍조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결국 심원씨는 양의 몸무게를 늘려 팔지 않게 되었고, 공신씨는 음탕한 처를 내쫓아 수치를 벗어났으며, 신귀는 노나라를 떠나버렸다. 공자가 다스리는 동안 노나라 사람들이 염치를 알게 되었으니, 나라는 절로 평온해졌다.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범죄를 피하겠지만 부끄러움을 알지는 못한다. 염치를 가르치면 스스로 수치를 알게 되니 자연히 법을 지키게 될 것이다.” 공자가 다스리자 나라는 평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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