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공자 (2)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苛政猛於虎 가정맹어호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禮記>檀弓下篇)
호랑이에게 가족 3대를 잃은 여인이 가혹한 정치가 없어 산중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노나라에서 공자(公子)가 태어난 것은 BC 551년이다. 노나라 양공 21년. 추읍이라는 고을이었다.

그로부터 160년 전, 이웃한 송나라에서 대부들 사이에 정변이 있었다. 대부 화독이 군주인 송 상공을 밀어내고 망명해 있던 상공의 사촌 풍을 불러들여 정권을 갈아치운 사건이다. 이때 상공의 정권을 맡고 있던 대부 공보가가 살해되자 그 직계 자손들이 피신하여 노나라로 왔다. 공자는 공보가의 6대 후손이다. 공보가는 송나라에서 군권을 담당하는 대부였으나, 후손들은 노나라로 와서 선비 신분이 되었다.

아버지 숙량흘은 문무를 겸한 지역대부였다. 본래 혼인을 했으나 자식을 얻지 못해 대가 끊기게 되자 칠출(七出=칠거지악)의 예에 따라 이혼하고 양가의 규수를 아내로 얻어 구(丘)를 얻었다. 그가 곧 공구(孔丘), 공자다. 낳을 때 이미 고령이었던 숙량흘은 공자가 세 살 때 죽었다. 어머니 안징재는 수도인 곡부로 올라가 구를 길렀다. 집 근처에 노나라의 종묘가 있어 어린 구는 자주 제례를 구경했으며 혼자서 그것을 흉내 내고 놀았다. 대여섯살 나이에 이미 제례의 순서를 꿰고 있었다 한다. 어머니에게서 글자를 배우자 빠르게 시서(詩書)를 읽고 즐거워하므로, 안징재는 아들을 고향으로 데려가 친정 아버지에게 맡겼다. 외할아버지 안양이 수를 다할 때까지 가르치고 죽으니, 공자는 19세가 되어 곡부로 돌아왔다.

서와 서 예에 두루 밝다는 명성이 곧바로 알려지면서 공자는 지역 대부인 맹의자 가문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맹의자의 이복형인 남궁경숙(사는 곳의 지명을 따라 남궁이란 성을 씀)과 친구가 되고, 성읍의 세무부장으로 처음 공직을 맡았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남궁경숙을 따라 낙양에 갔다가 노담(老子)을 만나 담론한 것이 화제가 되면서 공자에게 배우고자 하는 제자들이 크게 늘어났다. 30대에 육예에 통달하여 은행나무 아래서 가르치는 행단강학(杏亶講學)을 시작했다.

노나라 제후인 소공이 삼환과 겨루다가 밀려 제나라로 망명할 때 공자가 소공을 수행했다. 34세 때다. 가는 중에 태산 아래 외딴 산속 묘지 앞에 한 여인이 앉아 울고 있었다.

하도 서글피 울므로 자로를 시켜 까닭을 물으니 여인이 울면서 말했다.

“옛날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돌아가셨는데, 그 후 남편도 호환으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들마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으니, 슬퍼 울고 있답니다.”

“아니. 그렇다면 읍내로 이사를 가든지 할 일이지, 어째서 산속에 그저 살면서 피하지 않는 것입니까?” 공자가 의아하여 묻자 여인이 대답했다.

“그래도 이 산속에는 가혹한 정치가 없습니다.”

공자가 한숨을 쉬며 제자들에게 말했다. “명심할지어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로구나(苛政猛於虎).”

공자가 제나라에 머물 때 제 경공(景公)이 공자를 불러 예를 물었다. 공자가 답했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다른 날 다시 불러 정치를 묻자 공자가 답했다. “정치의 요점은 재물을 절제하는 데 있습니다.”

경공이 기뻐하여 공자를 등용하려 했으나 제나라 재상 안영이 반대했다. “무릇 유학자는 말재간이 있고 융통성을 잘 부려 법으로 규제할 수가 없으며, 거만하고 멋대로 하니 아랫사람으로 두기 어렵습니다. 상례를 중시하여 파산까지 하면서 장례를 크게 치르니 이를 풍속으로 삼기 어렵고, 도처에 유세하면서 관직이나 후한 녹을 바라니 정치를 맡길 수도 없습니다. 지금 공자는 용모를 잘 꾸미고 의례절차를 번거롭게 하며 세세한 행동규범을 강조하고 있으니 그것은 몇 세대를 배워도 다 배울 수 없으며 평생을 노력해도 그 예를 다 터득할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 그를 채용하여 제나라의 풍속을 바꾸시려 한다면 이는 천한 백성(細民)들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이후 경공은 뜻을 바꾸고 다시는 공자에게 예를 묻지 않았다. 공자는 2년 뒤 노나라로 돌아갔다.   

이야기 PLUS   

송나라는 과거 은(殷=商) 왕족의 나라다. 공자가 송나라 망명객의 후손이라는 것은 공자가 곧 은 왕족의 혈통을 물려받았음을 뜻한다. 지금에야 혈통에 관해 말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아무리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 해도 요순임금을 비롯한 삼황오제의 후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썼다. 이들은 중국이 여러 지역에서 대대로 정신적 지주며 물질적 토호로서 큰 영향력을 지녀왔기 때문에 새 권력이 민심을 아우르기 위해서는 이들을 결코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시황과 한(漢)나라를 거쳐 중국을 지배한 역대 왕가들 대부분이 춘추전국시대 이전의 왕과 제후들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삼황오제의 후손들은 황하문명의 주류라 할 수 있다. 제자백가 가운데서도 은나라 후예인 공자는 ‘혈통적으로’ 주류의 주류에 속했다. 신분 질서가 중시되던 중국 고대와 제국시대를 거치면서 공자의 사상이 중화문명의 핵심사상으로 살아남은 데에 그 영향이 전혀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공자는 용모를 잘 꾸미고 의례절차를 번거롭게 하며 세세한 행동규범을 강조하고 있으니, 그것은 몇 세대를 배워도 다 배울 수 없으며 평생을 노력해도 그 예를 다 터득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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