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吳 - 계찰괘검(季札掛劍)

정해용 시인ㆍ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ㆍ상임논설위원

辯而不德 必加於戮 변이부덕 필가어륙
말을 잘하면서 덕행이 없으면 반드시 살해당한다.<吳太伯世家>
자기 군주를 두 번이나 갈아치운 손문자에게 계찰이 근신하며 살 것을 권고하며

연릉계자 계찰이 노나라를 방문하여 주나라 모든 제후국들의 노래를 듣고 논평한 이후 그 명성은 온 중국에 자자하게 퍼져나갔다. 주나라에 가서는 여러 현인들과 예(禮)를 논했는데, 한 점 막힘이 없었다. 이로써 각국의 제후나 현자 학자들마다 한번쯤은 계찰과 만나보기를 원했다.

계찰이 사신 자격으로 제나라에 갔을 때 그를 맞은 사람은 안평중 즉 안영(晏嬰)이다. 안영은 제나라 영공과 장공 경공을 섬긴 명망가로, 후대에 안자(晏子)라 불린 사람이다. 지혜롭고 해박했으며 제후에게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

계찰은 안영과 만났을 때 모든 벼슬과 봉토를 반납하고 쉬도록 권했다. 뒤에 살피겠지만, 안영이 관직에 있는 동안 제 영공(靈公)은 태자를 바꾸려다가 본래의 태자인 광(장공)에게 밀려난 뒤 죽었고, 장공 또한 대부의 여자를 건드리다 피살됐다. 그 뒤를 이은 경공은 전쟁을 좋아하고 대부와 신하들이 서로 편을 나눠 다툼을 일삼았으므로 계찰은 마침내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을 예고했던 것이다. 안영은 계찰의 충고에 따라 벼슬과 소유를 내려놓음으로써 큰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위나라의 손문자는 헌공을 복위시킨 뒤 숙읍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계찰이 지나갈 때 손문자가 접대하면서 풍악을 울리게 했다. 계찰이 말했다. “이상하다. 내가 듣기로 말재주가 있으나 덕행이 없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辯而不德 必加於戮) 했는데, 당신은 왕에게 죄를 짓고도 여전히 향락을 누리고 있는가.” 손문자는 다시는 풍악을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정나라에 가서 대부 자산(子産)을 만나자 계찰은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와 같은 친근감을 느꼈다. 계찰은 정나라 노래를 들으면서 ‘제후국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망할 것 같다’고 했는데, 실제로 가서 본 느낌도 다르지 않았던지 자산을 위하여 이렇게 충고했다. “이 나라 집정자의 사치스러움을 보니 곧 재난이 닥칠 게 빤하군요. 그러면 곧 정권을 맡을 사람은 당신일 것이오. 국가의 예법을 따라 신중히 다스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정나라는 장차 몰락할 것입니다.” 자산이 계찰을 극진히 대접하면서 그 말을 명심했다.

진(晉)나라에서 조문자, 한선자, 위헌자를 만나자 말했다. “진나라 정권은 장차 당신들 세 가문에 집중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숙향(叔向)을 만나 말했다. “노력하시오. 왕이 사치하나 오히려 어진 신하가 많고 대부들은 모두 부유하니 정권은 장차 세 가문에게 돌아갈 것이오.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니 스스로 재앙을 면하도록 방법을 강구해야겠소.”

계찰이 처음 사신으로 떠날 때 오나라 북쪽의 서(徐)나라를 지나가면서 서나라 군주의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서나라 군주는 계찰이 오나라 사신의 상징으로 지니고 있던 보검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차마 내색하지 못했다. 계찰이 이를 눈치 채고는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보검을 그에게 주어야겠다고 스스로 마음에 정하였다. 계찰이 중원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보고 오나라로 돌아올 때는 여러 달이 족히 지나, 해가 바뀌어 있었다. 갔던 길을 거슬러 다시 서나라에 들렀는데, 그 사이 서나라 군주는 이미 죽고 없었다. 계찰은 죽은 사람을 위해 애도한 뒤 자신의 보검을 풀어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길을 나섰다.

“서군은 이미 죽었는데, 또 누구에게 주시려는 겁니까?” 시종들이 묻자, 계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이미 그에게 주기로 결정한 물건이니 더 이상 나의 물건이 아니니라. 그가 죽었다고 해서 나의 뜻을 바꿀 수가 있겠느냐(始吾心已許之,豈以死倍吾心哉).” 이로부터 ‘계찰괘검(季札掛劍=계찰이 검을 걸어두었다는 뜻)’이라는 말이 생겼다. 한번 마음에 정한 것은 변함없이 이행한다는 뜻이니, 변절하지 않는 신의의 표징이 된 것이다.
 

이야기 PLUS

계찰이 중원의 여러나라를 주유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당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거나 실세들이다. 그 중에서도 제나라의 안평중, 정나라의 자산, 진(晉)나라의 숙향 등은 성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었고 재상으로서도 능력과 청렴한 인품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계찰이 처음에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에 가서 학자들과 시(詩)와 예(禮)를 논할 때 어느 것에도 막힘이 없으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말도 있으나, 주나라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는 않는다. 여러 기록에 나타난 연대를 비교해 보면 당시 주나라 수도 낙양에는 노자가 왕실 서고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계찰과 노자가 만났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가 같은 시대 같은 러시아에 살았으면서도 교유가 없었던 것만큼이나 아쉬운 일이다.

오나라 왕 여제가 죽은 뒤 왕위는 동생 여말에게로 돌아갔고, 4년 뒤 여말이 죽으면서 마침내 넷째 아들인 계찰의 순서가 되었으나 계찰은 역시 사양하며 피해버렸으므로, 중신들은 여말의 아들 요(僥)를 왕으로 옹립한다. 그런데 이러한 계승에 불만인 사람이 있었다. 수몽왕의 장손인 공자 광(光)이었다. 만일 수몽의 아들들이 계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형제 상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왕위는 당연히 맏아들인 제번에게서 광에게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제 계찰이 왕위를 사양하여 더 이상 물려받을 삼촌이 없다면, 왕위는 다시 장손에게로 돌아와야 하지 않는가.” 광이 불만을 품고 있다가 요왕 13년 난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가 합려(闔閭)왕이다. 계찰이 합려를 쉽게 왕으로 인정하니 나라는 진정되었다.


“서군(徐君)은 이미 죽었는데, 또 누구에게 주시려는 겁니까?”

계찰이 대답했다. “한번 그에게 주기로 결정한 물건이니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그가 죽었다고 뜻을 바꿔서야 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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