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吳- 연릉계자 계찰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亂世之音 怨以怒 其政乖 난세지음 원이로 기정괴
난세의 음악은, 민심을 배반한 정치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담고 있다. (<禮記>樂記편)
음악으로 그 나라의 미래를 알 수 있는 것은 음악에 현실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주나라의 변방에 불과하던 오(吳)나라가 서서히 힘을 기르면서 중원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했다. 오나라는 중국 남쪽 이민족의 나라에 불과하지만 왕조의 시조는 본래 주나라 시조와 한 핏줄이다. 진(晉)나라 대부 신공무신이 오나라에 전차를 끌고 가 병법을 가르쳐준 것은 시조 오태백으로부터 19대손인 수몽(壽夢)임금 때다. 오나라는 기병의 운용법을 배우자 곧 강성해져서 인접한 초나라를 수차례나 공격하여 괴롭혔다.

수몽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그 중 넷째인 계찰이 현명하고 재능이 있어 수몽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나 계찰이 사양했다. 첫째인 제번이 왕위를 이었는데 제번 또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계찰에게 자리를 넘기려고 했으므로 계찰은 시골로 내려가버렸다. 그런데 제번은 13년 만에 죽으면서 둘째인 여제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아들이 아니라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이처럼 차례로 왕위를 물려주어 마침내 막내인 계찰에게 순서가 돌아가게 하려는 의도였다. 세상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려는 오왕 형제들의 우애를 칭송했지만 계찰은 왕이 될 마음이 없었다.

여제 4년에 계찰은 왕의 사신이 되어 노나라와 제나라를 방문했다. 이후 계찰은 오랫동안 중원의 각국을 주유하며 당대의 이름난 현인들과 교유를 맺고 스스로도 자자한 명성을 날리게 된다. 당시 홀어머니를 도와 주막집 일이나 하고 있던 노나라의 무명청년 공자(孔子)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세상을 위해 일하도록 이끌어준 스승도 계찰이었다.

계찰이 노나라를 처음 방문했을 때 중원 여러 나라의 음악을 들으면서 각 나라의 미래를 예언한 일은 유명하다. 노나라는 일찍이 주 성왕에 의해 주나라의 음악(周樂: <시경(詩經)>에 실려 있는 주나라 시대 각 제후국의 노래들을 포함함)을 하사받았으므로 계찰은 주 천하의 음악을 모두 들을 수가 있었다. 노나라 악사들이 먼저 주남과 소남을 들려주자 계찰이 말했다. “아름답군요.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으니 아직 높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백성들은 근면하고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 목소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어 패풍 용풍 위풍(衛風) 등의 노래를 들려주자 “아름답습니다. 음조가 깊어서 우수가 느껴지지만 곤궁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내가 듣기로 위강숙과 위 무공의 덕행이 이와 같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위(衛)나라의 음악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왕풍(王風)을 듣고는 말하기를 “근심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으니 아마도 주 왕실이 동천(東遷)한 후의 노래일 것입니다”라 하였다.

정풍(鄭風)은 정나라의 노래다. 계찰이 듣고 말했다. “정서가 매우 쇠약하게 들리니 백성의 힘겨운 삶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가장 먼저 망하는 나라일 것입니다”(뒤에 공자 또한 정나라 음악이 음란하여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예측한 것과 통하는 바가 있다).

제풍(齊風)은 제나라 노래다. “아름답습니다. 대국의 기상이 있으며 동해를 노래하는 것 같으니 필경 제나라 노래일 것입니다. 그 앞날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빈풍(豳風)을 듣자 “기풍이 크고 즐거워하면서도 지나침이 없으니 아마도 주공이 동쪽을 정벌할 때의 음악일 것이다” 하였으며, 진풍(秦風)을 듣고는 “이것은 중국의 음악이라 말할 수 있다. 능히 중국화한다면 웅대해져서 지극한 경지에 이를 것이다”라고 평했다.

위(魏)나라의 노래를 듣고는 “가락의 고저가 완만하고 호방하면서도 부드럽고 간략하면서도 평이하니 덕으로 다스리는 나라일 것이다”라고 하였고, 진(陳)나라의 노래를 듣자 “나라에 임금이 없으니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그는 종일 머물며 주악을 듣고 그 흐름에 따라 성인의 덕과 음절의 법도와 왕조의 흥망성쇠를 느끼거나 예언하였다. 현자들이 모두 그의 말에 놀라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찰이 하는 말은 모두 그 나라의 과거나 현실에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각 나라에 대한 그의 예언은 거의 그대로 들어맞았다.

이야기 PLUS

계찰의 논평은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음악평론일 것이다. 어느 사회를 대표하는 음악을 듣고 그 사회의 현실을 읽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음악에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감성과 정신이 담겨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뒤에 공자(孔子) 문하에서 완성된 <예기(禮記)>의 악기(樂記)편에서도 일렀다. “평화로운 세상의 음악은 그 정치가 온화한 까닭에 즐거움과 편안함을 담고 있으며(治世之音 安以樂 其政和), 난세의 음악은 그 정치가 민심에 어긋나는 까닭에 원망과 분노를 담고 있다(亂世之音 怨以怒 其政乖). 망국의 음악은 그 백성이 곤고한 까닭에 슬프고 시름에 잠겨있다(亡國之音 哀以思 其民困). 소리와 음악은 정치 현실과 깊이 통하는 바가 있다(聲音之道 與政通矣). 

돌아보면 우리에게도 시대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음악이 유행이 있었다. ‘울밑에 선 봉선화’는 식민지시대의 민중 정서를 대변했고, 해방 후 시대의 방만은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에 반영돼 있었다. 60년대를 관통하던 행진곡풍의 ‘잘 살아 보세’와 70년대 후반의 울적한 통기타 노래들, 80년대를 지배하던 운동권 노래들과 90년대를 뒤흔든 ‘교실 이데아’ 등은 제각기 당대의 시대정신을 이끌었다. ‘음악이 정치 현실과 깊이 통하는 바가 있다’는 선인의 말을 되새긴다면, 이 시대 정치인들도 거리에서 들리는 음악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위풍(魏風)을 듣자 “가락의 고저가 완만하고 호방하면서도 부드러우니 덕으로 다스리는 나라일 것이다” 하였고, 진풍(陳風)을 듣고는 “나라에 임금이 없으니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저작권자 © 현대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