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숲 작가

<삽화=조민성 화백>
<삽화=조민성 화백>

 

세상 끝에서 부르는 노래

 

4장 쉼표(2)

 

“잠깐이라도 앉아서 보세요.”

여자가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만 끄덕하고 계속 서서 책을 읽어나갔다. 그가 들려주는 록 인생은 충분히 매혹적이어서 비에 젖듯 속수무책 빠져들었다. 어린 시절 전설의 뮤지션들의 삶을 새롭게 각색해서 생생하게 들려주던 용주가 떠올랐다. 용주는 그 시절 뮤지션들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들은 어떻게 다 알게 된 걸까. 용주를 떠올리며 책장을 넘겼다. 내 입에서는 연신 감탄사가 뿜어져 나왔다. 기타의 여러 모양을 본뜬 텍스트 디자인이나 간혹 등장하는 핸드릭스의 공연 장면 사진 등도 나를 흥분시켰다. 번역이 자연스럽고 문학적이어서 마음을 더욱 뒤흔드는 것 같았다.

“힘들지 않으세요?”

“예? 뭐라고 하셨죠?”

“그 책에 완전히 몰입하신 거 같아요. 말을 시켜도 못 들으시고…… 그런데 어떡하죠, 문을 닫아야 해서요.”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다니, 죄송하게 됐습니다.”

나는 얼른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고민했다. 책 뒷면 바코드 옆에 새겨진 가격은 꽤 비싼 금액이었다. 지미 핸드릭스의 인생을 끝까지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을 꼭, 마저 읽고 싶었다.

“그 책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번역이 저랑 잘 맞아서 그런지, 울림이 깊네요.”

여자가 살 거냐고 묻듯 나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나는 재빨리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이 책 사고 싶은데, 급하게 나오느라 지갑을 놓고 와서…… 나중에 와서 사도 될까요.”

“그럼요, 언제든지요.”

나는 책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왠지 소중한 물건을 공공장소 같은 곳에서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자는 문 닫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오갔다. 나는 여자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책을 들어 다시 들춰보았다.

 

당신이 마음을 한데 모으고

내게로 온다면

우리는 손을 잡고

바다 밑바닥에서 해가 떠오르는 걸 보게 될 거예요

하지만 우선, 당신은 경험하셨나요

경험하신 적 있나요?

그럼요, 경험했죠

 

-지미핸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밴드, <경험하셨나요> 중에서

 

지미 핸드릭스의 기타연주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그의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 직접 연주를 하는 상상을 했다. 생각보다 내 모습은 멋졌다. 온전히 내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수많은 관객들의 환호 앞에 선 화려한 주인공. 짜릿했다. 비록 상상일지라도. 다시 무대에 서고 싶었다. 십 대의 그 시절처럼, 그 시절 맛보았던 무대에서의 환상에 휩싸인 경험을 다시 해보고 싶었다.

책을 더 읽고 싶은 미련이 찻잔에 남은 꽃잎처럼 잔잔하게 깔렸다. 밖에는 여전히 보슬비가 내렸고 서점의 불빛은 온화하고 따뜻하기만 했다. 이대로 여기서 밤을 새고 싶었다. 당연히 미친 생각이었다.

“지금 나가야 되는데, 가셔야죠?”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세차게 때리듯 정신이 후드득 들었다.

“예예, 지금 막 가려던 참이었는데.”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여자가 뒤따라 나와 문을 잠갔다. 굵은 빗방울은 보슬비로 바뀌어 있었다. 여자가 우산을 펼치며 물었다.

“참 우산 없죠? 어느 쪽이세요? 전 이쪽으로 가는데……”

“전 저쪽, 에덴모텔 혹시 아세요? 거기 묶고 있어요.”

“어 이 동네 분이 아니시구나. 음… 뭐 가까우니까 그 앞까지 같이 쓰고 갈까요?”

“그래 주시면 고맙죠.”

비를 맞아도 상관은 없었지만 여자의 선심을 굳이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의 말투는 거침없었으나 수선스럽지 않았고, 그렇다고 행동이 작거나 내성적인 성격도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속에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절제가 몸에 밴 듯했다. 처음 본 여자에게 이토록 많은 느낌을 받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여자에게서 십 대의 소라를 떠올렸던 건 아닐까.

비의 세기는 약했지만 우산을 쓰지 않으면 금방 옷이 젖을 정도였다. 일교차가 큰 시기여서 그런지 비의 감촉은 몹시 서늘했다. 여자가 우산을 펼치며 내게 우산을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우산을 받아 머리 위로 올렸다. 여자가 가볍게 우산 안쪽으로 들어왔다. 우산에 타닥타닥 부딪히는 빗소리가 듣기 좋았다. 길에 발을 내디뎠다. 여자도 내 발과 나란히 보조를 맞추며 두 발을 교대로 내디뎠다. 여자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편했다.

“이곳은 다른 도시보다 저녁이 빨리 와요.”

“그런 거 같군요.”

“그래서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이 없어요.”

“……”

“다들 제자리로 가는 거죠.”

“그렇겠죠.”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은 저녁이 더 이르네요.”

“그렇군요.”

“비 오는 거리 걷는 거, 몸도 마음도 말개져서 좋아요.”

“그렇죠.”

여자는 스스로 말을 거는 것처럼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음이 은은하게 깔리는 목소리였다. 여자는 질문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 보통 처음 만난 사람에겐, 특히나 이런 상황이라면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뭐든 묻게 마련이었다. 상대를 탐색하려는 심리는 대개 비슷하니까. 나는 여자와 우산을 같이 쓰기 전,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자의 물음에 어떻게 답을 할지 고민했었다. 어디 사세요? 왜 모텔에 계세요? 이 동네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등등. 하물며 아주 기본적인 신상파악으로 시작할 수도 있었다. 묻지 않고 답하지 않아서 편했다.

어둠에 잠긴 골목길, 드문드문 서 있는 수은등 불빛에 잘게 부서지며 떨어지는 무수한 비의 알갱이들을 바라보며 걷는 길, 빗소리에 섞인 우리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 열 걸음 이상의 시간만큼 조금씩 말하는 여자의 느낌이 좋았다. 둘 다 별 말없이 걸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기가 스쳤다. 한쪽 어깨가 많이 젖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산을 여자 쪽으로 밀었다. 나란히 찍히는 발소리를 들으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시간이 골목을 빠르게 훑고 지난 것처럼 순식간에 골목은 끝나 있었다.

노인의 가게는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거대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노인의 가게를 지나 모텔 앞에 도착했다. 모텔 입구에서 나는 우산을 건넸다. 슬쩍 스친 여자의 손은 따뜻했다. 나는 여자에게 어쩌면 영원히 마지막일지도 모를 인사를 건넸다.

“서점에서도, 우산도, 감사했습니다.”

“뭘요.”

“다시 가게 된다면, 그 책 꼭 사겠습니다.”

“그러세요. 전설들을 만나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니까요.”

“네? 아아, 그 전설들.”

“책을 사고 안 사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럼, 뭐가 중요하죠?”

여자는 발을 떼려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여자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잊지 않는 거, 기억하는 거요.”

여자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한 뒤, 종종 걸어 골목 끝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미 돌아선 여자의 등에 대고 인사를 했다. 잊지 않는 거? 기억하는 거? 여자가 쓴 보라색 우산이 비와 섞였다. 퍼플 레인. 여자를 만난 뒤 듣고 싶은 노래가 많아졌다. 아니 그 이전, 식당 남자를 봤을 때도 그랬고, 노인의 엉망진창 기타소리를 들을 때부터 떠오르는 노래도, 듣고 싶은 노래도 많아졌다. 만약 내가 죽지 않고 조금 더 살게 된다면, 자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 나는 여자가 사라진 골목 모퉁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서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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