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포악한 제 의공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정해용 시인·상임논설위원
不畏于天 將何能保 불외우천 장하능보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 자기 복을 지킬 수 있겠는가 <左傳>
노나라 계문자가 제나라 의공의 오만을 비판하여 <詩經>에서 인용한 말

진(晉)나라 문공이 죽은 BC 627년경부터는 중원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웃 정(鄭)나라의 문공이 같은 해에 죽었고, 1년 뒤에는 노나라 희공이, 이듬해에는 초(楚)나라의 성왕이 죽었다. 그로부터 5년 뒤에는 진(秦)나라 목공이 죽고 이듬해에는 주 천자 양왕이 죽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초 성왕, 진(秦) 목공, 진(晉) 문공은 모두 패권을 다투던 영웅들이며 힘과 덕망이 모두 뛰어난 제후들이었기 때문에, 천하는 한꺼번에 질서를 잃어버리는 듯했다.

그로부터 10년 정도 지난 BC 613년에는 초(楚)나라 목왕이 죽었고. 이듬해 노(魯)나라 문공과 제(齊)나라에서 소공이 죽었다. 잠시 제나라 권력의 변천사를 살펴보자.

제나라의 강력하던 환공은 그 스스로 의지하던 간신들에 의해 골방에 갇혀 있다가 어이 없이 죽었고, 너무나 많은 자식들은 권력다툼을 하느라 서로를 두려워하여 아버지를 보호하지 못했다. 많은 아들들 가운데서 송나라의 지원을 받은 태자 소가 먼저 제후가 되어 효공이라 불리었고, 10년 뒤에 효공이 죽자 간신 개방이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환공의 다른 아들 반을 옹립하여 소공이 되었다. 소공이 19년 만에 죽었다. 아들 사(舍)가 뒤를 이었으나 백성들은 아직 어린 그를 따르지 않았다.

환공의 다른 아들 상인(商人)이 사를 죽인 뒤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그가 의공(懿公)이다. 그는 환공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교만하고 잔혹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첩의 아들인 의공은 형인 소공이 죽고 아들 사가 즉위하였을 때, 곧 패거리를 규합하여 사를 시해했다. 그리고는 형인 원에게 군주자리에 오르도록 권했으나 원은 거절했다.

“그 자리는 네가 오래전부터 바라던 자리가 아니냐. 내가 그 자리에 오르면 언제 네 손에 죽을지 모를 일. 차라리 너를 임금으로 모시는 것이 낫겠다.”

원은 위나라로 떠나가고, 상인은 두 달쯤 시간을 끌다가 노나라에 사정을 알리고 스스로 제후가 되었다. 노나라의 기록 <춘추>에서는 상인이 벌인 일을 알고 있는 까닭에 그를 공(公)이라 부르지 않고 보통 사람을 뜻하는 씨(氏)라는 호칭으로 기록했다. 의공은 노나라를 비롯하여 주변 제후들에게도 인심을 크게 잃었다.

의공의 병거를 모는 마부 병융의 아버지는 의공이 공자시절 사냥을 같이 나갔다가 포획물을 두고 소유권을 다툰 적이 있었다. 의공이 즉위했을 때 병융의 아버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는데, 예전의 사소한 원한을 갚기 위해 무덤을 파내 발 자르는 형을 가했다. 의공이 한 번은 어떤 유부녀에게 반하여 궁중으로 데려왔는데, 그녀의 남편 용직에게 자신의 병거에 참승하는 무관의 직책을 맡겼다.

어느 여름날, 의공이 호숫가로 놀러나갔다. 그를 수행해온 병융과 용직도 따로 물놀이를 하면서 놀고 있었다. 마부 병융이 말채찍으로 용직을 치자 용직이 화를 냈다. 병융이 더 약을 올리느라 “마누라를 빼앗기고도 화를 못내는 녀석이 뭐 이깟 일로 화를 내는가.”라고 놀렸다. 그러자 용직은 “자네야말로 아버지의 다리를 자른 자를 모시고 있지 않은가.”라고 대꾸했다. 두 사람은 곧 의기소침해졌다. 생각해보니 서로가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원한이 같은 데 있음을 알고 의기투합했다. 의공이 마차에 오르자 병융은 깊은 숲속으로 말을 몰았다. 용직이 칼을 뽑아 의공을 찔렀다. 두 사람은 시신을 대숲에 버려두고 돌아와 축배를 나눈 후 술잔을 내려놓고 그 길로 떠나가 버렸다.

제나라 사람들은 이미 의공을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의공의 아들을 버려두고 위나라에 가 있던 의공의 공자 원을 불러와 군주로 세웠다. 그가 제 혜공이다.


이야기 PLUS 

춘추 5패라 불리는 춘추시대 최강의 제후들 가운데서도 제 환공의 위치는 우뚝하다. 그러나 그는 현인 관중의 유언을 무시하고 노년까지 간신들에 둘러싸여 지내다가 부끄럽게 굶어죽었고, 이후 40여년에 걸쳐 무려 다섯 명의 아들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으며 대권을 다투었다.

젊어서 위험과 고생을 하면서도 자수성가하여 거부가 된 사람들 가운데에도 가족의 질서를 바로 일구지 못하여 스스로 비참하게 죽거나 바로 자식의 대를 넘기지 못하고 패가망신에 이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평생의 고생이 무슨 의미와 보람이 있을까 싶을 것이다.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웃들에게 덕을 많이 쌓고, 특히 자식들에게는 단지 재물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고 지혜로운 지성의 능력을 길러주어 후대를 잘 이어가게 하는 것이 참다운 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의공의 실패는 탐욕스럽고 남에 대하여 배려 없는 인간의 최후가 어떠한지를 가르치고 있다. 아무리 폭군이라 해도, 자신을 지키는 측근들에게는 값싼 의리일망정 은덕을 베풀어 자기 안위를 맡길 수 있게 하는 게 보통이다. 이를 무시하여 호위무사와 마부의 손에 죽었으니, 현대식으로 말하면, 최측근 수행원과 운전기사의 손에 죽은 셈이다. 잔혹한데다 지혜롭지도 못해 화를 자초했다.

“마누라를 빼앗기고 화도 못내는 녀석이.”
병융이 놀리자 용직은 “자네야말로 아버지의 다리를 자른 자를 모시고 있지 않은가.”라고 대꾸했다.
두 사람은 서로가 같은 원망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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