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거미줄과 잠자리

 

14

 

“삼촌, 제발 문을 열어 줘.”

정식은 둘째 작은아버지 김인도(金麟燾)에게 방문을 두드리며 사정했다. 어떻게든 방에서 빠져나와 도망쳐야 했다.

정식이 할아버지를 따라 집에 당도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다. 그런데도 마당과 마루, 방들에 호롱불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울 밑에는 새로 화덕을 만들어 부인네들이 전을 부치고, 부산하게 부엌을 들락거렸다. 입맛을 당기는 기름 냄새가 집안에 진동했다.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 교사로 있는 둘째 작은아버지 김인도도 집에 와 있었다. 밖에서 만나면 서로 항렬을 따져야 알 수 있을 먼 데 사는 친척들까지 방들을 차지해 술을 마시고 정겹게 이야기를 나눴다. 잔치 준비는 바로 정식을 위한 것이었다.

정식은 사랑채 골방에 갇혔다. 모처럼 만난 작은아버지가 지난 이야기나 나누자고 꾀는 통에 골방에 들어갔다. 정식은 정식대로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고 작은아버지를 설득하거나 사태를 피할 방도를 강구하고 싶었다.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작은아버지는 형처럼 놀이를 하면서 어린 시절을 지냈다. 그런데 갇혔다. 작은아버지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밖에서 골방 문을 걸어 잠그고 지켰다.

정식은 악을 쓰고 문을 때려 부슬 듯 두드렸다. 창호지가 찢어지고, 문살이 부셔졌다. 골방에 있는 책들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장롱 문짝도 때려 부쉈다. 작은아버지는 못 들은 척 뒷마당을 오가는 사람들과 잡담만 나눴다. 웃음소리도 들렸다. 정식의 발악이 거세질수록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야, 김인도! 네 옷과 책들을 다 찢어 버리겠어. 문 열라.”

어린 시절 서로 다툴 때처럼 반말로 협박했다. 작은아버지는 그래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실제 벽에 걸린 작은아버지의 두루마기를 쭉쭉 찢었다. 집안 식구들 또한 정식의 아우성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머니와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희희낙락하는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집안을 맴돌 뿐이었다. 정식은 자신의 시간이 다 끝나고 지옥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15

 

굴레를 꽃술로 치장한 백마 위에 정식이 올라탔다. 사모관대를 차렸다. 고개를 푹 숙여 부끄러움과 불만, 몰염치가 동시에 비낀 얼굴을 숨겼다. 백마를 끌고 온 옆 마을 마부가 백마의 고삐를 잡고 앞에 섰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정식의 집 앞 거리로 나왔다. 풍습에 따라 정식이 혼례식을 올리러 신부 집으로 출발하려는 참이었다. 정식의 나이 열다섯 살. 혼례를 올리기에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적당한 나이였다.

“신랑, 얼굴을 들어라.”

구경꾼들 틈에서 누군가 외쳤다.

“어깨도 의젓하게 펴고.”

“고추는 잘 건사됐는지 만져 보고.”

구경꾼들이 와아 웃었다. 우스워서 웃는다기보다는 좋은 날이니까 일부러라도 웃음을 선사하려는 마음이 작용했을 터였다.

제일 앞에 선 악대가 삼현육각(三絃六角)을 불었다.

삘리리리, 삘리삘리이이…….

피리의 날카로운 고음이 뒤따르는 장구, 해금 소리와 함께 이내 흥겹게 어우러졌다. 구경꾼들이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이럇!”

마부가 백마의 고삐를 당겼다. 악대를 뒤따라 백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물을 진 짐꾼들과 정식의 가족들, 동네사람들이 뒤를 이었다.

“정식아! 정식아!”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행렬이 멈춰 섰다. 아버지가 괴춤을 붙잡고 백마 앞으로 튀어나왔다. 부르는 이가 아버지인 줄 알면서도 마부가 말을 세웠다. 여느 때 같았다면 무시하고 그냥 갈 터였다. 그래도 신랑 아버지니 무슨 특별한 당부나 덕담이라도 할까 기대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아버지에게 쏠렸다. 물론 일부는 무슨 사고를 치지 않을까 우려하는 눈길을 보냈으리라.

“히히. 저기 순이네가 운다. 히히히.”

순이네는 오순의 의붓어머니를 이르는 말이었다. 정식은 돌아보지 않았다. 실제 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백마가 떠렁떠렁 워낭을 울리며 다시 출발했다.

정식은 구경꾼들의 덕담을 흘려들으며 상념에 빠졌다. 사랑은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틔어 올라온 지고지순한 것, 사랑 이외의 대가와 바꿀 수 없는 것. 그것이 일시적 착시라니. 거짓이라니. 아내 될 사람과의 사랑은 어른들이 주재하는 약혼과 혼례의 관문을 거쳐서 완성되는 것이라니. 예로부터 내려온 관습과 전통이라는 말로 자연스럽게, 너그럽게, 당연하게 받아드리라니. 정식은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거짓과 적당히 몸을 섞는 행위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어제의 정당함이 오늘 부당함으로 변한다면 나는 매일 잘못을 저지르며 살고 있다는 말일까? 그것이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고? 동경과 동정, 그리움이 쌓인 자학과 한, 그것이 내 몫일까? 결국 나는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에 지나지 않을까?

어느덧 행렬은 동구 밖으로 나가는 다리를 지나는 중이었다. 차가운 강물에서 오리들이 헤엄을 쳤다. 바람과 맞서 힘겹게 어깨를 앞세우고 몸뚱이를 이끌어갔다. 먹이 구하고 번식하는 것밖에는 관심이 없는 저것들과 인간의 삶이 무엇이 다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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