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거미줄과 잠자리

 

5

 

정식은 오순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었다. 오순의 몸에서 지금까지 맡아 본 적이 없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 정식은 자꾸 얼굴을 더 깊이 묻었다. 그러다가는 오순의 속옷 속을 더듬었다. 오순은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되레 그동안 가장 금기시했을 법한 은밀한 곳으로 정식의 손을 이끌었다. 백사장처럼 부드러운 평원에 이르렀다. 오순이 이끄는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정식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오순의 손이 이끌지 않아도 정식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다보독한 숲과 만났다. 숲에서 일어나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다. 장가간 동무들을 가운데 놓고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댔었다. 듣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귀 기울여 듣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었다. 숲이 손 안으로 쏙 들어왔다. 슬며시 숲을 헤쳤다. 정식의 샅에 돌출된 것이 이렇게 우람한 줄 몰랐지, 라고 말하듯 불뚝불뚝 몸을 부풀렸다. 세상에서 제일 단단한 것일지라도 뚫고 나갈 기세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원한 것이 돌출부 끝에서 쑥 빠져나갔다. 무엇인지 모를 것들을 이루어냈다는 쾌감이 밀려왔다.

그때 오순이 정식의 손을 잡아 홱 뿌리쳤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벌떡 일어나 뺨까지 갈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하는 거야! 이런 엉큼한…….”

별안간 성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식은 당황하여 살그머니 눈을 떴다. 여명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방금까지 보였던 꽃이불과 댕기머리와 촛불이 자취를 감추었다. 인상이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배찬경이었다. 아, 꿈을 꾸었구나. 정식은 여전히 기숙사에 머물고 있었다. 엊저녁 오순에게 편지를 쓰고 잠이 든 생각이 났다. 정식은 편지에 머잖아 우리가 혼인을 하게 될 것이며, 미리 준비할 혼수가 많을 테지만, 자신의 집에서 비용을 댈 수 있도록 할아버지께 부탁드리겠다고 썼다.

배찬경이 이불을 걷어치웠다. 정식은 축축해진 아랫도리를 들킬세라 이불의 한 자락을 끌어안고 샅에 끼웠다.

“너도 장가갈 때라는 신호가 온 거야. 뺨만 한 대 갈겨서 정말 다행이야. 내 아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걸 잘라가려는 놈인 줄 알았다우.”

배찬경이 정식의 꼴을 보면서 큭큭, 웃었다. 정식은 팔목에 차고 다니는 댕기를 코에 댔다. 아직도 남아 있는 오순의 냄새가 은은히 코 안으로 스며들었다.

6

 

쉴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정식은 두 통의 편지를 들고 느티나무 밑 벤치로 달려 나왔다. 수업 시작 직전 사환으로부터 받은 편지였다. 궁금증이 폭발 직전에 다다랐었다. 하나는 오순으로부터 온 것이었고, 하나는 분가하지 않고 할아버지 밑에서 사는 첫째 작은어머니로부터 온 것이었다. 벤치에 앉았다. 응당 오순의 편지부터 뜯었다. 오순에게 편지를 보낸 직후부터 편지가 마을들을 지나 오순의 집에 이르기까지, 오순이 답장을 쓰고, 그것이 다시 마을들을 지나 정식에게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지루함을 견디며 몇 번씩 어림한 뒤끝이었다. 차라리 오순의 집으로 달려갈까 고민했었다. 그렇게 점잖지 못한 대응이 진심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 같아서 참고 참았었다.

 

편안하오?

정식은 나를 떠났지만, 나는 한 순간도 정식을 떠난 적이 없소. 남산학교 시절 서춘 선생님에게서 빌려 읽은 어떤 책의 구절이 생각나오. 책 속 주인공이 여행 중에 어느 곳에 이르렀소. 그곳에서 신비로운 꽃과 나무들, 지혜를 체득한 순한 사람들을 만났소. 거기에 반해서 다음 여정을 접었다오.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오. 지금 내 입장이 그러하오. 내 사랑의 여정이 정식을 종착점으로 하여 멈추어 버렸소. 내 영혼 속으로 정식이 깡충 뛰어 들어왔단 말이오. 혼인 따위가 무슨 대수요. 몸은 가까이 있지 못할지언정 마음이 동거하면 되는 것이오. 정식이 웃으면 나도 웃고, 정식이 울면 나도 울고, 정식이 아프면 나도 아플 것이오.

내내 건강하길 바라오.

 

정식은 오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를 처음으로 듣는 것처럼 기뻤다. 한 자락 못 미더운 구석이 있었지만, 그것은 오순의 자존심과 결부된 부분이리라.

다음으로 작은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를 뜯었다. 소소한 일로는 구태여 편지를 보내지 않으리라. 작은어머니는 집안 여자 중에서 제일 학문에 밝을 뿐만 아니라, 정식과 가장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아마도 집안을 대표하여 보낸 것이리라. 내가 없는 가운데 내 중대사를 결정하는 일에 어떤 논의가 오갔을까? 오순에 대해서도 논의가 미쳤겠지? 어머니나 첫째 작은어머니는 오순과 정식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갓놈 조카에게.

어제 할아버지가 구성 조악동 금광에서 돌아오셨어. 하산 길에 평지동에 사는 오랜 동무 홍시옥(洪時玉) 씨를 우연히 만났다는군.

 

작은어머니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갓놈은 정식의 어린 시절 애칭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라고 해서 붙인 이름이었는데, 여덟 살에 남산학교에 들어간 뒤까지 오래도록 불렸다. 다감한 사랑이 배인 이름이어선지 작은어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지금까지도 종종 갓놈이라고 불렀다.

홍시옥 씨는 할아버지가 반가워 손을 놓지 않았단다.

“우리 집에 가서 약주나 한 잔 나누며 다리쉼을 하고 가오.”

할아버지도 뿌리칠 만큼 바쁘지 않았지. 자연스럽게 홍시옥 씨의 집으로 향했다는구나. 사랑방에서 술상을 사이에 두고 앉았어. 서로 그동안 변한 형편들을 이야기 나누었지. 그때 방문 밖으로 나이가 찬 처자가 지나가는 모습이 할아버지 눈에 띄었단다.

“딸이오?”

“맞소.”

할아버지는 처자가 참하게 생겼다고 여겼지.

“혼처는 정했소?”

“아직…….”

“내 손자 놈이 있는데…….”

홍시옥 씨는 귀가 솔깃했을 것이야. 서산 평지동에서야 홍시옥 씨네가 가문으로나 재산으로나 손꼽히는 집안이지만, 곽산 남단동에서 알아주는 우리 가문과 재산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 단지 신랑감 아버지가 실성한 사람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야. 그렇다 해도 홍시옥 씨로서는 청혼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겠지.

이렇게 뜻밖의 자리에서 네 혼약의 말이 오고 갔단다. 할아버지가 귀가하셔서 집안 식구들을 모아놓고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집안 식구들은 반대하고 나설 흠을 찾지 못했다. 다만 할머니는 궁합이 맞아야 한다는 토를 다셨다. 할아버지는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라고 말씀하면서도 선심 쓰시듯 그러자고 대답하셨다. 물론 궁합이 맞지 않더라도 할아버지가 당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으시리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네 어머니는 무조건 할아버지 결정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고작 그 말뿐 평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네 아버지가 네 어머니를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든 탓이었다. 그날 저녁나절에 할머니는 칠성이네 할머니를 찾아가 궁합을 보았다. 하늘에서 정해준 연분이라는 답을 얻었다. 참 다행이었다.

네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나는 일부러 옆집에 가서 혼약 소식을 떠들었다. 예상처럼 순이도 그 소식을 들었더구나. 밭을 둘러보러 나가다가 길에서 순이를 만났는데, 아주 잘 된 일이라고 축하해 주더구나. 너희 둘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것 같아서 그것 또한 다행이었다.

 

모두 제멋대로군. 정식은 자신과 관계없이 자신을 두고 벌어진 일에 대해서 큰 불만을 품었다. 어머니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작은어머니는 왜 순이 누이를 당연하다는 듯 배제시켰을까? 정식은 두 개의 편지를 그러쥐고 참담한 기분에 빠졌다. 가슴 저 깊은 곳에 아무리 뽑아도 뽑히지 않을 독초 하나가 자라나는 것을 느꼈다. 수업 시작종이 울린 줄도 모르고 한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배찬경이 부르러 와서야 정식은 느티나무 가지가 갈가리 찢어 놓은 하늘을 바라보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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